[靑山別曲]<7>캔버스위 '하늘색 꿈' 서양화가 강운

  • 입력 2003년 10월 22일 18시 30분


1980년대 시대와의 불화를 캔버스에 담았던 서양화가 강운씨는 자연 속에서 안식과 구원을 얻으면서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으로 눈을 돌렸다. -화순=허문명기자
1980년대 시대와의 불화를 캔버스에 담았던 서양화가 강운씨는 자연 속에서 안식과 구원을 얻으면서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으로 눈을 돌렸다. -화순=허문명기자
서양화가 강운(姜雲·40)씨는 하늘을 그리는 작가다. 대형 캔버스에 정처 없이 흐르는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가 밀려온다. 언제부터였던가, 우리는 더 이상 하늘을 보지 않는다. 어디 하늘뿐일까.

그가 그린 하늘에는 이제는 다가갈 수 없는 어떤 것, 영원하며 끝이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진한 갈망이 묻어난다. 그는 회화가 무력해진 시대에 낭만적이고 탐미적인 그림으로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한때 ‘민중미술작가’였던 그가 이념에서 자연으로 눈을 돌리기까지의 과정에는 가파른 삶에서 벗어나 근원을 찾으려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담겨 있다.

전남대 83학번인 그는 고교 시절 ‘광주’를 겪었고 데모대에 끼어 길거리에 나뒹구는 시신도 보았다. 1980년대에 그는 시대에 대한 반항과 우울과 분노를 캔버스에 담았다.

그리고 90년대가 왔다. 이념과잉에서 이념혐오로 갑자기 변한 시대는 그에게 허무를 안겨 주었다. 믿었던 것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정신적 공황상태에서 도대체 무엇을 그릴 수 있었을까. 그 무렵 그는 이념 저 너머의 절대나 영원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진도 씻김굿에 반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굿을 통해 화해하는 게 좋아 전남 진도에서 살리라 맘먹은 적도 있었지만 정작 그가 정착한 곳은 해남 땅이었다. 진도 가는 길에 잠깐 들른 해남 바닷가 마을의 버려진 창고에 작업실을 만들고 상처 입은 짐승처럼 들판과 바닷가를 헤맸다.

그는 자연 속에서 위안받고 구원받았다. 인간 세상에서 그토록 갈망했던 영원과 질서가 자연 속에 있었다. 특히 그를 붙잡았던 것은 ‘밤’이었다. 어둡고 음울한 밤을 풍경으로 나무, 산, 하늘, 바다를 그렸다. 안식처를 찾긴 했으나 온전히 자신을 던지지 못하고 주저하던 마음이 이 시절의 캔버스에 담긴 셈이다.

이제 그는 시간 앞에서 겸손해질 차례였다. 해남 생활을 청산하고, 담양으로, 광주로 떠돌다 화순 동복에 정착한 것이 97년. 그는 이곳에서 다시 고뇌에 빠진다. 도대체 내 삶은 왜 행복하지 못한 것일까.

결국 원인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 불안과 불만의 정체가 남이 아닌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새가 울고 웃고, 꽃이 피고 지고 계절이 바뀌는 동복의 자연 속에서 그는 나날이 겸손하고 여유로워지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내면이 변하면서 그림은 더욱 단순해지고 밝아졌다. 땅도, 산도, 나무도 빠지고 하늘만 남았다. 시간과 공간, 빛과 그림자, 생성과 소멸, 순간과 영원, 이 모든 것이 하늘과 구름에 있었다.

창고를 개조해 만든 그의 작업실은 논 한가운데 있었다. 남도 땅의 푸근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감싸고 있는 이곳에서 그는 도시락을 들고 출퇴근하며 작업한다.

“하루 중 저녁나절이 가장 좋아요. 작업실 밖으로 나와 논밭을 거닐며 저녁노을을 바라보면, 저릿하면서도 따뜻한 기운들이 내 안에 충만해집니다. 어쩌면 너무 평범해서 지루한 시골 생활이지만 바람, 구름, 빛, 노을 이 모든 것들에서 에너지와 긴장, 역동성을 발견하지요. 대자연의 순환을 몸으로 겪다 보면 인간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작은 존재인지….”

세상과 제도에 대한 미움도 많았다는 그에게 “이제 행복해졌느냐”고 물었다. 그는 “약간 부족한 상태를 채우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니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물감을 직접 만들어 쓰는 그의 요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차갑고 우울한 ‘블루’가 아니라 따뜻하고 행복한 ‘블루’를 만들어 하늘을 표현할까 하는 것이라고 한다.

화순=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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