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우 확보와 축우 증산을 목표로 다시 부활된 도살권 제도로 인하여 나 어린 소들의 밀살이 권력기관을 배경으로 연일 공공연하게 자행되어 도살권 제도 부활 목적에 역효과를 낼 뿐 아니라 이대로 간다면 명년 춘경기 농우의 대부족을 초래할 위기에 봉착하였다 한다.
(…) 금번 조치로 인하여 대략 四세 이하의 소가 밀살되는데 나어린 소가 밀살 되는 이유로서는 처분이 용이하다는 것과 큰 소보다 적은 소가 구입이 용이하다는 점 등이 열거되고 있다.
현재 서울시에서는 도살권 제도가 부활된 이래 매일 五十여 두를 도살할 것을 제한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당국의 제한수보다 밀살하는 수자가 훨신 많다고 하는 바 시내 四개 도살장 외에서 매일 밀살되고 있는 수효는 七十두에 달하고 있다 하며 왕십리 모 밀살장에서는 매일 十여 두의 어린 소가 밀살된 후 ‘추럭’으로 공공연히 시내 각 소매업자들의 손으로 들어가고 있다 한다.
<동아일보 1953년 11월 5일자에서>
▼소 밀도살 성행… ‘뒤’ 봐주는 권력 있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서민에게 쇠고기는 명절에나 누리는 호사였다. 그것도 차례상에 올랐던 쇠고기 적(炙)을 썰어 떡국이나 탕국에 고명으로 얹은 게 고작이었다.
명절이면 시골에선 소 추렴을 위해 밀도살을 하기도 했지만 작업은 당국의 눈길을 피해 한밤중에 조심스럽게 이뤄졌다. 그런 마당에 상업 목적의 밀도살이 공공연히 자행됐다니 권력 배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겠다.
‘농우(農牛) 확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그 시절 소는 농사에 없어선 안 될 동력원이자 농가 재산목록 1호였다. 황소 한 마리 값은 대략 논 한 마지기 값과 맞먹었다. 부지런한 농가는 송아지를 성우(成牛)가 될 때까지 정성스레 먹이고 길들인 뒤 내다 팔아 땅뙈기를 늘리기도 했다.
50년대 중반 1인당 연평균 쇠고기 소비량은 약 500g. 지금의 8.45kg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양(量)만 변한 게 아니다. 위생개념의 정착과 함께 밀도살이 사라진 것은 그렇다 쳐도 넘쳐나는 수입쇠고기와 ‘인삼 소’ 등 브랜드 쇠고기의 물결 속에서 옛날 가마솥에 쑨 쇠죽을 먹고, 일도 적당히 하며 자란 소의 그 순박한 고기 맛은 이제 찾을 길이 없어졌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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