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비나 국수로 끼니를 이었던 ‘깡촌’의 농사꾼 자식은 늘 배가 고팠다. 고교시절 시골에 놀러온 대학생들이 괜히 미워 작대기로 흠씬 두들겨 패기도 했다. 고 2때 심장판막협착증을 앓고 있던 셋째 누이는 21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과 불화하면서 꼴등을 독차지했던 그는 고교 은사의 권유로 지방 국립대 토목공학과에 진학한다. ‘아무 것도 몰랐던’ 시골 청년의 눈에 농민으로 사는 아버지의 척박한 삶과 부조리한 현실이 새삼스레 아프게 다가왔다. ‘왜 열심히 농사지어도 생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렇게 매달렸던 시(詩) 공부도 그만뒀다. ‘시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은 헛되다고 생각했고, 시는 구호일 뿐이라고 생각해 더 쓸 수 없었다. 다만 슬픔은 분노로, 눈물은 독(毒)으로 가슴에 묻어두었다.
대학생 때인 스무 살 어느 가을밤, 방황 중 섬진강변 압록역 대합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 새벽녘 서늘한 손 하나가 호주머니 안으로 들어왔다. 섬뜩했지만 잃을 것도 없어 잠자코 있었다.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서 나온 것은 뜻밖에도 5000원짜리 한 장. 이를 여비삼아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 표’를 끊고, 다시 살아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그는 10년간 도로공사현장에서 토목기술자로 일하면서도 곁에 늘 ‘현대문학’과 ‘현대시학’을 두었다. 먹고 사느라 삶에 앉은 더께를 벗기 위해 그는 96년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시를 쓰기로 결심한다. 98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데 이어 최근 첫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를 펴냈다. 여성적이고 유약한 정서가 두드러지는 요즘 시단에서 보기 드물게 강인하고 남성적인 체취를 풍기는 시집이라는 호평이 이어졌다.
화성지역에선 보통 한 사람이 1만5000∼2만평 정도 농사를 짓는데 그는 7000평 논에서 놀면서 일하는 까닭에 ‘건달농사’를 짓는다고 말한다. 그는 아이들에게 좋은 쌀을 먹이고 싶어 2년 전 유기농법을 도입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지금은 ‘화성 오리쌀 작목반’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환경운동에도 열성이다. 화성에 쓰레기소각장이 들어선다고 하자 아내, 세 아이와 반대 전단을 만들어 돌리기도 했다.
시인은 농사가 생활 자체라고 생각해서인지 “농사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딱 잡아떼면서도 “그러나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땅, 흙”이라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재작년에는 화성에서 농사짓고 사는 서양화가 방주홍, 한국화가 한상업 등과 동인(同人) ‘야예(野藝)’를 만들었다. 이들은 올 6월 화성시 양감면에서 미술 전시와 농악 공연을 중심으로 농민들의 축제인 ‘접근 2003’을 열기도 했다. ‘시 씁네 하면서 잘난 척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던 시인은 “같은 농민들끼리 거방지게 한번 놀아봤더니 그렇게 흥이 날 수 없더라”고 전했다.
문학도, 농민들과 더불어 사는 삶도 시인에게는 이제 출발일 뿐이다. ‘희망은 더 이상 슬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그해 겨울’ 중)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알고 있다. 그는 현실에 맞서 독을 품어 무장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화성=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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