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12월 13일자 동아일보 ‘휴지통’에서>
▼대학 나온 접대부 화제… ‘종3’ 전성시대?▼
6·25전쟁 직후의 시점은 미군기지 주변의 기지촌과 함께 이른바 종삼(서울 종로3가)으로 대표되는 ‘내수용’ 홍등가가 막 번성하기 시작하던 때다.
정부는 서울 수복 뒤 종로3가 일대에 국회의사당 등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운 일이 있다. 그 같은 방침이 흐지부지되는 사이에 철거대상지에 윤락여성과 포주들이 몰려들어 거대한 환락가를 형성한 것이 바로 종삼이다.
기생으로 불리던 요정의 ‘접대부’들이 소극적인 방법으로 웃음을 팔았다면, 이 윤락가의 ‘위안부’들은 행인의 소매를 잡아끄는 등 보다 노골적이었다. 그러다보니 윤락이 사회문제로 대두될 때마다 당국의 단속이 되풀이되곤 했다.
기사에 소개된 치안국 통계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을 것이다. 지금이야 ‘아르바이트’로 매춘을 하는 여대생도 흔하다지만, 그 시절 어지간한 대갓집도 딸자식 대학 보낼 엄두를 못 냈을 터에 대학 나온 접대부와 위안부가 있었다니 이채롭기도 하다.
1961년 ‘윤락행위 등 방지법’이 제정되고 69년에는 종삼 윤락가가 철거되는 등 매춘에 대한 규제는 해를 거듭하며 강화돼 왔지만 매춘은 줄기는커녕 오히려 확산되어 온 게 현실이다.
올 2월 발표된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은 모두 33만명이고 여기서 발생하는 경제규모가 국내총생산의 4.1%, 24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청량리 588’과 ‘미아리 텍사스’ 등을 포함한 전국의 윤락가는 69개소, 이곳의 윤락여성은 9092명으로 조사됐다.
그나마 매매춘의 현황을 지나치게 적게 추산했다는 비판이 있을 정도니 이제는 매매춘의 ‘타락상’을 탓하는 것조차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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