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시인은 한중간 고구려사 논쟁의 본질을 ‘21세기 동아시아의 중심을 선점하기 위한 역사전쟁’으로 규정했다. 미래의 강자가 되기 위해 왜 과거의 전쟁을 벌여야 하는가. 역사전쟁이라면 무엇을 전략과 전술로 삼아야 하는가. 고구려는, 그리고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문명의 역사화’에 관심을 기울여온 시인과 ‘역사의 문명화’를 추구하는 역사학자 윤명철 동국대 겸임교수(49·고구려연구회 이사)가 24일 경기 고양시 일산구 장항2동 김 시인의 자택 거실에서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 21세기와 역사전쟁
▽윤명철=고구려는 기원전에 세워진 나라이고 멸망한 지 1300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 와서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높아진 듯합니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사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진행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도 있을 것 같은데요.
▽김지하=나는 소위 숨겨져 있는 역사의 의지,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섭리 같은 것이 움직여 새 차원이 나타나기까지의 혼란스러운 과정이 계속된다고 봅니다. 흔히 문명의 전환기라는 표현을 쓰는데 문명의 끝과 시작이 맞물려 있는 ‘종시(終始)’라는 말을 쓰고 싶습니다.
▽윤=지금은 고구려가 멸망한 7세기 후반과 상황이 비슷합니다. 고구려와 수·당간의 전쟁은 동아시아적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이었지요. 전쟁이 끝나고 당시 동아시아의 강국이었던 고구려는 역사의 생명을 상실했고 고구려에 밀리던 중국은 완전한 통일을 이루어 패자(覇者)가 됐어요. 그 무렵인 670년 일본열도는 우리의 구심력에서 벗어나 일본이라는 국호를 채택하면서 3개 지역체제가 형성됐습니다.
▽김=20, 30년 전 한국은 국가의 비전이 산업화와 민주화였고 이 두 가지가 싸우는 형국이었습니다. 나는 이 두 가지의 시효가 이제 마감됐다고 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의 비전은 무엇일까요. 크게 보면 하나는 흔히 얘기하는 동아시아 물류(物流)의 허브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류를 통해 제시되는 문화교류, 즉 문류(文流)의 허브가 되는 것이지요. 나는 틀림없이 한국이 동아시아의 허브가 되리라고 봅니다.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혁신운동이나 사업은 반드시 과학의 향기, 문명의 향기가 크게 일어났던 지역의 약간 옆에서 시작됐거든요. 큰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문명의 전선(戰線)이 있는 지역, 비슷하면서도 작고 다른 향기가 나는 곳이 고구려였습니다.
▽윤=21세기 동아시아는 하나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중일 3국이 긴박한 경쟁을 벌이고 있지요. 역사전쟁은 역사의 자기소유를 통해 문화적 패권을 쥐려는 것이고, 정치 경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명분을 축적하려는 것입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동아공영권을 실천하기 전의 단계로서 반도사관(半島史觀·한국의 역사적 영역을 한반도만으로 좁혀 해석)이나 만선사관(滿鮮史觀·일본의 만주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주사를 중국사에서 분리, 만주와 조선을 한 체제 속에 묶는 사관)을 내세웠던 과거를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중국은 동아시아의 패권 장악뿐 아니라 중화질서를 재현하고 조선족 등 소수민족의 반란을 약화시키기 위한 명분을 위해 역사전쟁에 매달리고 있어요.
● 역사 전쟁은 사관(史觀)의 싸움
▽김=청춘기에 받은 고통은 평생 갑니다. 한국이 동북아의 허브로 막 일어서려는 의미심장한 시간에 고구려사가 저렇게 되면 큰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지요. 중국과의 역사전쟁은 사관으로 싸워야 합니다. 고구려사를 회복하려면 어떤 해석학이 필요한가를 생각해야지요.
▽윤=부끄러운 얘기지만 우리 사학계는 스스로 잉태한 사관이나 사상이 없습니다.
▽김=행동이든 삶이든 우리 나름의 중심사상이 있어야 합니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주장하면 국수주의라고 내치는데 그것만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지요. 내 껍데기가 몇 개냐의 문제인데, ‘가이아 이론’으로 유명한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은 인간이 자기의 막(膜)을 가지고 있고 막이 자기 정체성의 근거라고 했습니다. 나의 인체는 가죽이라는 막이 있고 민족에 대해서는 민족의 막이 있습니다. 우리는 민족주의자이자 아시아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세계주의자입니다.
▽윤=고구려 문제도 마찬가지겠군요. 고구려 문제를 민족적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동시에 세계사적 시각에서 보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전략과 전술을 수립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화를 부정해서도 안 되지만 우리를 중심으로 하지 않으면 탈민족주의라는 신제국주의에 투항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역사는 미래다
▽김=지금은 혼란의 시기입니다. 이에 대해 새롭고 과학적이고 통합적인 처방이 나와야 하는데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불을 붙여주는 문화이론, 다시 말해 사상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생명 평화 조화의 세 가지 덕목입니다.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는 다양성이 살아있는 문명으로 이 세 가지에 대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다고 봅니다.
▽윤=고구려는 한민족사에서 반도사관을 완벽하게 극복한 나라였습니다. 고구려는 대륙과 해양을 동시에 지배했던 나라로 동아시아의 모든 문화가 모이는 중심지였습니다. 고구려인들에게는 선택받은 천손(天孫)민족이라는 자부심과 역동성, 탐험정신이 있었어요. 저는 고구려사를 통해 우리의 사관을 형성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를 ‘해륙(海陸)사관’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김=역사는 과거의 학문이 아닙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만 가지고 싸우면 안 됩니다.
▽윤=저는 역사학이 미래학이라고 봅니다. 한국 사학계는 사실을 찾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택한 사료라는 것이 우리가 아니라 중국인들이 취사선택한 것이 주가 됐어요. 그러한 비아(非我)의 기록을 통해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사실 외에 행간에 숨어있는 진실과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김=우리는 신화를 읽음으로써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은 잘 하지 않습니다. 신화도 역사입니다. 우리가 환상이나 신화를 대할 때도 내적, 무의식적, 상징적 전개를 읽고 동시에 당대의 역사, 생명의 여러 양태를 짚어나가야 하지요. 우리가 세계사 전체에 대해 방향이나 원형을 제시할 수 있는 첫걸음이 오늘날의 고구려 문제라고 봅니다.
▽윤=지금의 고구려 논쟁이 100년 후가 되면 효력 있는 사료가 됩니다. 역사를 잃어버리면 영토를 내주어야 하는 명분을 주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상생(相生)과 평화를 위해서도 우리는 역사를 지키고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정리=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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