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바이올리니스트’로 꼽히는 고(故) 예후딘 메누힌은 10여년 전 장영주를 ‘가장 훌륭하고 완벽하며 이상적인 바이올리니스트’라고 격찬했었다. 이 ‘신동(神童)’이 지금은 거장으로 우뚝 서 있다. 지난 10여 년간 매년 뉴욕필의 초청으로 무대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성가가 확인된다.
신동 음악가로서 사춘기 고개를 무사히 넘기고 최고의 성인 예술가로 거듭나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장영주는 이겨냈다. 그는 “나 자신에게보다 음악에 더 집중했으며 달력을 보고 하루하루가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는 말로 고생담을 간단히 날려버린다.
웅장한 에이버리 피셔홀의 매표소 오른쪽 대리석 벽에는 영예로운 ‘에이버리 피셔 프라이즈’(상금 5만달러) 수상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첼리스트 요요마(1978년),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1991년)과 함께 장영주(1999년·미국명 사라 장)와 미도리(2001년) 등이 올라 있다. 미국의 피셔전자 창업주인 에이버리 피셔(1906∼1994)의 기부로 만들어져 미국의 최고연주가에게 주어지는 이 상은 29년간 17명의 주인을 만났을 뿐이다.
장영주는 세계 수준의 독주자로 성장할 재능이 있는 연주가에게 매년 시상되는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상금 1만5000달러)를 1992년에 받았다. 열한 살에 역대 최연소로 수상했다. 다음해엔 권위의 영국 ‘그라모폰’ 신인아티스트 부문상을 역시 최연소로 받았다. 어린 천재 연주가로서 ‘에이버리 피셔’와 ‘그라머폰’을, 최고 성인연주자의 반열에 들어서면서 ‘에이버리 피셔 프라이즈’를 통해 세계무대에 그의 이름을 남긴 셈이다.
“(천재성을) 부모님도 처음엔 몰랐대요. 저도 그랬고요. (그런 표현이) 영광이긴 하죠. 그렇지만 저의 목표는 좋은 음악가가 되는 것이에요. 다른 음악가들과 함께 음악을 즐기면서요. 실내악을 해보니 재미있어서 앞으로 더 하고 싶어요.”
‘천재’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네 살 때 처음 잡은 바이올린으로 1년이 채 안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했고 그 뒤 각국에서 초청장이 줄을 이었다. 다섯 살에 바이올리니스트인 부친 장민수씨(미 템플대 교수)의 스승인 도로시 딜레이 줄리아드음대 교수(2002년 작고)의 눈에 띄어 줄리아드 예비학교 장학생으로 본격 지도를 받은 것이 큰 힘이 됐다.
“운이 좋았죠. 줄리아드에 다닐 때 친구들이 각종 대회에 나가 탈락하고 다시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행운아라고 생각했어요. 오디션도 딱 두 차례밖에 하지 않았고 EMI와 음반 녹음을 한 것도 아홉 살 때였어요. 16, 17세에 다들 겪는 대입 고민도 없었고요.”
여덟 살 장영주의 두 차례 오디션은 세계적인 명성의 리카르도 무티와 주빈 메타 앞에서 각각 치른 것이었다. 이들은 그의 연주 솜씨와 곡 해석 능력에 반해 서둘러 뉴욕필 무대를 주선했다. 그동안 장영주 옆에서 지휘봉을 잡은 거장들은 다니엘 바렌보임, 콜린 데이비스 경, 샤를르 뒤트와, 베르나르드 하이팅크, 앙드레 프레빈, 볼프강 자발리쉬 등.
장영주는 이제 세계인이다. 세계를 돌며 연주여행을 한다. 미국 유수의 오케스트라는 물론이고 유럽 무대에도 자주 선다. 작년 말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다녀왔다. 차이코프스키의 묘를 둘러보고 쇼스타코비치홀에서 연주하고 모처럼 동행한 가족과 함께 도시구경도 했다.
올해 주요 협연 일정만 꼽아도 2월초 오르페우스 챔버오케스트라(뉴욕 카네기홀), 6월9일 런던심포니 100주년 축하공연(런던 바비칸홀), 10월초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킴멜센터) 등으로 이어진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화려한 무대다. 2006년 시즌까지의 연주 일정이 확정됐고, 요즘은 2007년 시즌 일정을 짜는 중이다.
솔로의 연주투어는 매주 새로운 골프장에서 경기를 갖는 프로골퍼의 투어와 비슷하다. 한 도시에 가면 수요일 리허설을 갖고 목∼일요일 무대에 선다. 월, 화요일 필라델피아 집에 머물고는 다시 짐을 챙겨 다음 무대로 향한다.
“연주투어 초기엔 초청하는 곳마다 다 가고 싶은 욕심에 왔다갔다 하느라 힘들었어요. 요즘은 조정을 해서 유럽에 가면 한두 달 머물 수 있게 일정을 짜요. 연주의 60% 가량은 미국에서 하고 아시아에는 매년 한차례 가죠. 6∼8월 3개월은 여름방학인 셈이지만 이때는 서머 페스티벌에 참여해요.”
장영주는 ‘무대에서 전혀 긴장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연주가로서 큰 장점이다. 청중들이 무엇을 하는지, 어떤 느낌으로 연주를 듣는지를 살펴볼 정도.
“무대에서 청중을 만날 때가 가장 행복해요. 현장에서 청중들과 호흡을 나눠가면서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표현을 하는 것이 참 좋아요. 연주실황 음반을 만드는 것이 더 좋고요. 서양의 청중은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데 한국에 가면 나이 어린 청중이 많아서 더 좋아요. 미래가 있으니까요.”
뉴욕·필라델피아=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
▼23살 천재의 사생활 ▼
장영주는 천재소녀 시절부터 ‘성(城)안의 공주’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취미가 많다.
학교 대표선수급 실력이었던 수영은 연주투어에 지친 몸을 추슬러주는 특효약이다. 테니스, 롤러스케이트 등도 좋아한다.
그는 “작년 하와이 연주 때는 짬을 내서 행글라이딩을 즐겼다. 매니지먼트 회사 관계자들이 걱정하면서도 무척 놀라더라”고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10학년(고1)인 동생 영진(16)의 야구나 하키경기를 구경하는 것도 큰 즐거움. 요즘 하키 스틱을 내려놓고 첼로를 들고 다니며 필라델피아 고교생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는 동생을 누나는 안쓰러운 듯 지켜보고 있다. 집에선 빨래, 요리 등을 직접 한다.
‘공항-호텔-무대’로 이어지는 연주여행길의 벗은 책과 전화기. 지금 손에 들린 책은 ‘쇼스타코비치 회상록’이지만 닥치는 대로 읽는 ‘잡식성’이다. 장영주는 “정크(한때 유행하다 사라지는 소설류)도 많이 읽는다”며 웃는다. 음악을 하면서 대학에서 미디어나 심리학을 전공하고 싶어 했을 정도로 이들 분야에 관심이 많다. 랩탑 컴퓨터는 들고 다니지 않고 현지 호텔 컴퓨터에서 이메일을 체크한다.
세계 곳곳의 많은 친구들은 장영주의 ‘힘’. “친구 만나러 가는 기분으로” 연주여행을 떠나고 현지에서 틈이 나면 친구들을 만난다. 영화도 보고 쇼핑도 하면서 건축물도 보고 미술작품도 감상한다. ‘놀면서 배운다’고. 그래야 그 나라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거기서 나온 음악을 잘 연주할 수 있다는 것. 밝은 미소가 트레이드 마크인 장영주는 여행하면서 본 것들을 이야기할 때면 “너무 좋았어요”라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남자친구나 애인에 관해 묻자 “꽉 짜인 투어스케줄로 바빠서 사귈 시간이나 있겠냐”고 작곡가인 어머니 이명준씨가 대신 대답한다.
바이올린 연습 시간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그는 “투어 때는 리허설이나 인터뷰 등으로 바빠 충분히 시간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운 곡은 집에서 연습한다”며 “다만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호텔에서 베이직은 매일 30분씩 꼭 하고 스케일도 매일 한다”고 소개했다.
장영주의 바이올린은 8년전 구입한 ‘과르네리 델 제수’로 1717년 제작된 명기(名器)다.
▼장영주는 ▼
▽1980년 12월10일 미국 필라델피아 출생
▽3세에 피아노, 4세에 바이올린 배우기 시작
▽6세에 줄리아드 음대 예비학교 입학
▽1989년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
▽1990년 주빈 메타 지휘의 뉴욕필과 서울 공연(국내 데뷔)
▽1992년 EMI에서 세계 최연소로 음반 발매
(9세 때 녹음)
▽1992년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 수상
▽1993년 영국 그라머폰 신인 아티스트 부문상 수상
▽1996년 남미 순회연주
▽1999년 에이버리 피셔 프라이즈 수상
▽2004년 2월 13번째 음반 발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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