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賞을 받은 한국인들]<5>국제콩쿠르 성악1등 최현수

  • 입력 2004년 2월 1일 19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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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전 13승, 무패.

권투선수를 꿈꿨던 성악가 최현수(崔顯守·46·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전적’이다. 물론 주먹이 아니라 목소리의 승부였지만 그는 패배를 몰랐다. 보통 사람들은 그의 13차전만 기억한다. 1990년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 성악부문 1등. 그것은 등반에 비유하면 에베레스트산 등정과 같았다. 그것도 동양인 최초로. 기악과 성악을 통틀어 이 봉우리를 다시 정복한 한국인은 아직 없다.

그러나 최현수는 훨씬 이전부터 세계 성악계에서는 기적 같은 존재였다. 이탈리아 유학시절이던 1986년 그는 역시 동양인에게 미답봉으로 남아 있던 베르디 국제콩쿠르에서 1등상과 최고 바리톤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그것은 이탈리아에서 유학하던 동양인 성악가들에게는 ‘환희의 송가’였다. 이탈리아 성악가들에게 콧날이 짓눌려 있던 그들은 이 소식에 큰 공원에 모여 파티를 열었을 정도다.

88년 미국에서 열린 파바로티 국제콩쿠르 우승은 무려 1700여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이뤄낸 것이었다. 그가 “내 연배의 10년 위와 10년 아래를 합친 모든 성악가와 승부해 한번도 지지 않았다”고 자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현대 성악가 중에서 독일 중세 때 끊임없이 노래 대결을 펼쳤던 마이스터징어(匠人歌手)에 가장 근접한 가수라 할 그의 성취 뒤에는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이 숨어 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다. 6남매의 막내 외동아들이었지만 고교 시절 악보 살 돈은커녕 차비도 넉넉지 않아 서울 봉천동 산동네에서 신촌의 학교까지 3∼4시간씩 걸어 다녔다.

하지만 그는 대단한 야망과 남다른 꿍꿍이를 가진 사내였다. 어릴 적부터 노래는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노래자랑에 한번도 나서지 않았다. ‘내 인생의 비장의 무기로 감춰두자’는 생각에서였다. 그가 잘했던 것은 축구와 ‘싸움’이었다. 키는 작았지만 중학생 시절 영등포 일대 주먹들과 매일 밤 결투를 치렀다. 수많은 학교 걸상을 맨손으로 때려 부수는 차력을 즐겨 선생님으로부터 야단맞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별명이 ‘괴물’이었을까.

그러다 변성기를 맞은 중학교 2학년 때 강화자 베세토 오페라단장을 음악교사로 만났다. 그의 노랫소리를 들은 강 선생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내가 들은 남자 목소리 중에서 세계적으로 대성할 목소리는 너 하나밖에 없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성악 전공을 위해 뭘 준비해야 할지도 몰랐고, 알았다 해도 집안형편상 불가능했다.

집안 장독대 위에서 독창, 교회 성가대에서 악보 읽는 법 배우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곡 암기해 부르기…. 턴테이블은커녕 녹음기 하나 없던 그의 노래공부는 그렇게 시작됐다. 노래를 부르기 위해 반주가 필요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종이건반을 교복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독학으로 피아노를 익힌 것. 고교 1학년 때부터 점심시간이면 음악실로 달려가 피아노 반주로 매일 한 시간씩 콘서트를 열었다. 언제부턴가 수십명의 학생 팬들이 몰렸다. 졸업 때까지 이어진 이 수백 차례의 콘서트 경험이 든든한 배짱을 키워줬다.

정규 음악시간 외에 개인레슨 한번 받은 적이 없는 그는 77년 연세대 음대에 실기시험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의 대학생활은 기행의 연속이었다. 매일 오전 7시 등교해 통금 직전에 귀가하며 연습에 매달렸다. 심지어 한 강의가 끝나면 다른 강의실로 뛰어가 담당교수가 들어올 때까지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을 했다. ‘남보다 10분만 더 열심히 하자’가 그의 모토였다.

그의 레퍼토리는 대학 4년간 1000여곡으로 불어났다. 또 그는 엄청나게 많이 들었다. 세계적 성악가의 음반을 5000장이나 섭렵하며 그들 각자의 호흡법과 발성법을 익혔다.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였지만, 동시에 기성(旣成)에 대한 철저한 반항아였다. 신입생 때 교수를 찾아가 커리큘럼의 경직성을 지적할 만큼 당돌했던 그는 지금도 말한다. “한국의 음대에서는 고기를 잡아줄 뿐 정작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진 않는다.”

그는 원래 독일 가곡(리트)형 가수였다. 그가 ‘바리톤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단아하고 이지적인 리트를 섬세하게 소화해내기 때문이다. 유학도 독일행을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 4학년 때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에 출연하면서 오페라 가수로서의 재능에 눈뜨게 된다. 그는 새로움에 도전한다는 마음으로 84년 이탈리아 유학을 떠났다. 리트의 창법과 오페라의 창법은 축구와 농구만큼이나 달랐다. 아예 허리에 끈을 묶고 살아가는 호흡공부에만 1년이 걸렸다. 장학금이 유일한 돈줄이던 그는 이탈리아에서도 여전히 차비를 아끼기 위해 발품을 파는 ‘뚜벅이’ 신세였다.

그런 악전고투를 벌이면서 그는 성악 전문 아카데미 4곳을 모두 수석으로 졸업한다. 콩쿠르 사냥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였다. 우승트로피를 거머쥘 때마다 무대 제의가 들어왔지만, 그는 이를 뿌리쳤다. ‘아직 내 음악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가 13개나 되는 콩쿠르에 도전한 것에는 성악의 전 분야를 하나하나 정복하겠다는 야심이 숨어 있었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독일 리트, 이탈리아 오페라, 러시아 가곡 등을 망라해 심사가 이뤄진다는 점에서 그 화룡점정이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최현수 교수는 ▼

▽1958년 서울 출생 ▽1983년 연세대 성악과 졸업 ▽1984∼1988년 이탈리아 베르디국립음악원 수석졸업, 스칼라극장 오페라 전문과정 수석졸업, 오지모 아카데미 수석졸업, 카를로 베르곤치 아카데미 수석졸업

▽1986년 베르디 콩쿠르 1등 ▽1988년 파바로티 콩쿠르 1등 ▽1989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센터 전문과정 졸업, 파바로티와 오페라 공연(‘사랑의 묘약’ ‘루이자 밀러’) ▽1990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1등

▽1992년 카네기홀 독창회 및 미국 순회공연 ▽1993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현)

1990년 구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9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성악부문 1등상과 차이코프스키상(러시아 레퍼토리 최고가창상)을 받은 뒤 그 상장을 들고 있는 최현수. 그는 러시아 노래에서도 러시아인을 누르고 최고상을 받았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를 기려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국제 음악콩쿠르. 흔히 폴란드의 쇼팽 콩쿠르,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와 함께 ‘세계 3대 국제 콩쿠르’로 꼽힌다. 1958년부터 4년마다 개최된다. 제1회 때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2개 부문이었으나, 2회 때 첼로, 3회 때 성악을 추가해 4개 부문이 됐다.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을 비롯한 러시아 작가의 작품이 경연과제로 많이 선정된다. 피아노의 반 클라이번,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미하일 플레트네프와 첼로의 미샤 마이스키, 바이올린의 기돈 크레머 등 정상급 연주자를 배출했다. 한국인으로는 최현수 외에 정명훈(74년 피아노 2위), 루드밀라 남(78년 성악 2위), 백혜선(94년 피아노 3위), 제니퍼 고(94년 바이올린 2위) 등이 수상했다.

▼美무대 떠나 귀국한 까닭은 ▼

최현수는 바리톤으로서 정상에 선 시기에 홀연 한국행을 택했다. 이탈리아 유학을 마친 뒤 88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파바로티와 함께 공연하면서 미국 무대에 데뷔, 그 뒤 뉴욕시티 오페라,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필라델피아 오페라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 뒤에는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는 물론 전미 순회 리사이틀도 가졌다.

당시 그에게는 ‘한 세대에 한두 명 나올까 말까 한 베르디 가수’라는 극찬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오페라 가수가 아니라 다양한 노래를 소화하는 리사이틀 가수였다. 베르디 오페라 가수는 부와 명성을 거머쥘 수 있을지 모르지만 평생 베르디의 노래만 불러야 하는 굴레를 써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오페라 무대에서 바리톤 가수는 워낙 기근이라 혹사당하기 일쑤입니다. 저와 함께 데뷔한 바리톤 가수 중 오페라 무대에 남은 가수가 없을 정도니까요.”

독일 가곡에선 피셔 디스카우, 프랑스 가곡 제라르 수제, 이탈리아 가곡 티토 곱비와 에토레 바스티아니니 등 부문별 대가의 장점을 복원하고 종합하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199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개교에 맞춰 음악원 교수로 초빙되자 그는 주저 없이 응했다. 실력보다는 이름값에 매몰된 한국 클래식계의 사대주의를 깨고 싶었다.

“남의 땅에서 농사짓는 일은 이젠 그만둬야죠. 수확물은 들고 올 수 있을지 몰라도 땅은 들고 올 수가 없습니다. 카네기홀에 서는 것을 꿈꾸기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을 카네기홀로 만들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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