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賞을 받은 한국인들]<7>백건우…‘건반위의 거인’

  • 입력 2004년 2월 15일 17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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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씨는 ‘힘든 길’만 골라 간다. 전곡 연주와 난곡 연주, 초연을 즐긴다. 그래서 ‘피아노의 구도자’라고 불리는 그는 대기만성형일 수밖에 없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백건우씨는 ‘힘든 길’만 골라 간다. 전곡 연주와 난곡 연주, 초연을 즐긴다. 그래서 ‘피아노의 구도자’라고 불리는 그는 대기만성형일 수밖에 없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나는 알고 싶다(J’aime comprendre).”

지난달 16일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는 이 같은 제하에 피아니스트 백건우(白建宇·58) 특집기사를 실었다. 프랑스를 주 무대로 활동 중인 백씨는 이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소르크스키의 작품에 ‘전람회의 그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연주자도 그의 다른 피아노 독주곡을 연주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작곡가의 작품을 시작하면 그 작품을 둘러싼 모든 걸 알고 싶다. 라벨을 시작했을 때도 그의 작품이 좋아 결국 전곡(全曲)을 연주했다.”

이 신문은 백씨를 ‘학자 같은 피아니스트’라고 묘사했다. 백씨는 ‘힘든 길’만 골라간다. 한 작곡가의 모든 곡을 연주하는 ‘전곡 연주’는 그의 트레이드마크. 걸핏하면 초연(初演), 난곡(難曲) 연주다. 그래서 ‘피아노의 구도자(求道者)’라고도 불린다.

학문이나 구도가 어디 쉬운 일인가. 파리에서 만난 백씨는 “왜 그렇게 힘든 길을 가느냐”는 질문에 “다 알아야 속이 시원하다. 베토벤의 음악을 연주하기로 했으면 그의 모든 곡은 물론 당시의 역사나 회화까지 꿰뚫고 싶다”고 답했다. 그는 “위대한 작곡가의 곡이라도 아직 연주되지 않은 작품은 태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그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전성기를 누리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를 해도 완벽하게 끝내고 가는 스타일은 대기만성(大器晩成)형일 수밖에 없다.

1960년대 후반 후진국 한국에 ‘백건우’라는 20대 초반의 청년이 유럽의 각종 피아노 콩쿠르에서 수상하고 있다는 낭보가 들렸다. 그 뒤 파리에 정착한 백씨가 은막스타 윤정희와 결혼했다느니, 이들 부부가 납북될 뻔했다느니 하는 뉴스가 들려 왔다. 그러나 백씨의 음악 활동에 대해서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간간이 유럽에서 음악회를 열고 있다는 얘기뿐.

그러던 백씨가 다시 국내외 음악계의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였다. 그의 음반들이 디아파종 금상, 누벨 아카데미 뒤 디스크 등 유럽의 권위 있는 음반상을 휩쓸었다.

그중에서도 음반 전문지 ‘디아파종’이 수여한 92년 금상은 특별하다. 수많은 거장(巨匠)의 음반이 쏟아져 나오는 프랑스에서 1992년 한 해를 통틀어 주요 분야별로 1명씩 주는, 말 그대로 최고의 상이었다.

이어 리스트, 스크랴빈, 라흐마니노프, 멘델스존 등의 작품집을 잇달아 출반한 백씨는 1998년 세계 5대 메이저 음반사 중 하나인 BMG의 출반 제의를 받는다. 52세 때였다. ‘디아파종’ ‘그라모폰’ 등 권위 있는 음반 전문지들은 RCA 레이블로 나온 그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연주를 두고 그를 ‘건반 위의 거인(Titan)’이라고 평했다.

백씨는 “젊은 날 유명해지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그가 1972년 라벨의 피아노 독주곡 전곡 연주로 유명해지자 카네기 홀 연주나 저명한 연주자와의 협연 제의가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때는 음악 공부가 덜 됐기 때문에 이름을 내기보다는 음악에만 몰입했다”고 했다.

그는 1980년대 초 프랑스에서 리스트의 작품 50여곡만으로 6회에 걸쳐 연주회를 한 일이 있었다. 이 연주회를 위해 그는 리스트의 전 작품을 수집해 연습하고, 수십 권의 리스트 관련 서적을 읽는 등 무려 4년을 준비했다. 부인 윤씨는 “온 집안에 리스트 악보가 널려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런 집념과 완벽주의가 없었다면 오늘의 백건우가 있었을까. 그 스스로도 “나는 토끼가 아니라 거북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백씨는 요즘 ‘잘 나가는’ 일부 젊은 연주자에 대한 걱정을 많이 했다. “요즘 연주자들은 나라 경제가 좋아진 덕을 많이 본다. 스폰서 시스템도 잘 돼 있다. 그러나 빨리 성공하려고 하면 위험하다. 음악은 빨리 이루기 어렵다.”

그는 “인기 있는 곡, 화려한 곡을 연주하면 청중은 잡지만 남는 게 없다”며 “먼저 음악을 자기 것으로 만들면 결국 청중도 알아준다”고 덧붙였다.

젊은 연주자들도 무대를 가리는 세태지만 백씨는 지방 연주를 마다하지 않는다. 아니 즐긴다. “한번은 경북 안동에선가 연주를 했는데 연주회가 끝난 뒤 한 여학생과 어머니가 찾아왔다. 그들은 ‘서울에서 열리는 연주회에 가려면 1시간 반 연주를 듣기 위해 이틀을 허비한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음악인으로서 진정한 행복감을 느꼈다.”

한국의 지방 연주 때면 주변에서 서성이다 다가와 “존경해요”라고 속삭이는 아이, 사탕을 손에 쥐어주고 줄달음치는 아이들 때문에 새삼 지방 연주의 중요성을 느낀다고 했다.

이런 겸손함과 순수함이 그를 한눈팔지 않고 음악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원동력인 것 같다. 그는 “힘든 연주생활을 접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프랑스 고등음악원을 비롯해 교수 제의가 많았지만 다른 일에 신경 쓰면 연주자로서 타격이 크다. 아직 육체적 한계는 느끼지 않지만 늙어도 나이에 맞는 곡들이 있다. 죽을 때까지 연주하겠다.”

“음악 작업에 끝이 없으므로 상을 타고, 무얼 했다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고 말하는 그는 트레이드마크인 ‘전곡 연주’처럼 피아니스트로서의 전 인생을 힘 있게, 그러면서도 아름답게 연주해 가고 있다.

파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에게 윤정희는 매니저이자 그의 음악 세계를 지탱하는 힘이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백건우-윤정희씨 부부愛 ▼

‘바늘 가는 데 실 간다.’

이 말처럼 백건우 윤정희(본명 손미자·59)씨 부부에 꼭 들어맞는 표현이 있을까. 백건우씨가 가는 곳에는 늘 윤정희씨가 있다.

백씨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윤씨는 말을 거들고 남편의 어렴풋한 기억을 되살려주며 추임새를 넣었다. 그러다 윤씨가 말실수를 하자 둘은 한참 동안 깔깔거리며 웃었다. 웃음보를 참지 못하는 사춘기 소년 소녀 같았다. 이런 순수함과 부부애가 거장 백건우를 버티게 하는 저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씨는 남편의 연주 일정을 관리하는 매니저 역할도 한다. 기자가 인터뷰 요청을 했을 때 “인터뷰에 앞서 프랑스 신문에 난 기사를 읽어보라”고 전화해 온 사람도 윤씨였다. 남편의 음반재킷 사진의 상당수도 그가 찍었다.

두 사람은 “‘심청’이 만나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1972년 뮌헨올림픽 문화축제 때 한국영화 ‘효녀 심청’(감독 신상옥·申相玉)이 상영됐다. 주연배우였던 윤씨는 신 감독과 함께 뮌헨에 갔다가 윤이상(尹伊桑)의 오페라 ‘심청’의 세계 초연을 보러 갔던 백씨와 처음 만났다. 74년 파리에 정착한 백씨는 파리에 유학 간 윤씨와 ‘우연히’ 다시 만나 76년 결혼했다.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윤씨는 ‘피아니스트 내조’ 역할보다는 화려한 삶을 꿈꾸지 않았을까. 윤씨는 “어릴 때부터 돈에 억눌리는 인생은 살고 싶지 않았다”며 “조건을 떠나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과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고 싶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백씨가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던 시절에도 남편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남편의 음악에 자신이 있었다. 연주 스케줄이 뜸해 연습만 할 때도 ‘레퍼토리를 늘리는 것이니 결국 재산을 늘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윤씨는 “남편은 지금도 집에서 밤 10시까지 연습할 때가 많다”며 “나 같으면 도저히 그렇게 못한다”고 말했다. 듣고 있던 백씨는 “좋아서 하는데 힘들 게 뭐 있느냐”며 “내가 음악에 바친 것보다 음악이 내게 준 게 더 많다”고 거들었다.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부부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백건우씨는

디아파종 금상

△1946년 서울에서 출생. 8세 때 무작정 음악이 좋아 피아노를 ‘만지기’ 시작. 10세에 첫 독주회

△1961년 도미(渡美). 예술고등학교 입학. 반주와 레슨 아르바이트도 하며 배고픈 유학생활

△1965년 미국 줄리아드 음악학교 입학. 한때 영화 공부를 할까 고민하며 방황

△1969년 이탈리아 부조니 콩쿠르 금상

△1972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뉴욕 오케스트라와 협연

△1974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

△1976년 윤정희씨와 결혼

△1977년 백씨 부부 납북 미수 사건

△1992년 프랑스 디아파종 금상 수상

△1993년 프랑스 누벨 아카데미 뒤 디스크에 선정

△2000년 프랑스 정부 예술문화기사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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