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줄타기 세계챔피언 권원태씨

  • 입력 2004년 4월 20일 18시 43분


이달 9일 미국 플로리다 탬파베이에서는 특이한 대회가 열렸다. 한국을 비롯해 미국 중국 프랑스 등에서 온 줄타기 고수(高手) 1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여 줄 위에서 누가 가장 빨리 다리는지를 겨루는 자리였다.

가만히 서 있기에도 아찔한 지상 8m 높이의 줄 위에 선 한국 대표 권원태(權元泰·37·안성 남사당바우덕이 풍물단)씨는 절로 긴장했다. 30년 가까이 줄타기를 해 왔고 예선을 조 1위로 통과한 그지만 세계 최고를 가리는 승부가 결코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결승에서 맞붙은 상대는 무려 7대째 가업으로 줄타기를 하고 있는 미국인 티노. 출발 신호와 함께 두 사람은 힘껏 달렸다. 권씨가 50m를 질주한 시간은 19초33. 미국 대표의 기록 23초와 큰 차이로 여유 있게 우승한 것이다. 대회를 주최한 일본 니혼TV측은 이 기록을 기네스북에 등재하기 위해 관련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미국이나 중국에는 줄타기하는 사람이 적어도 수백 명은 됩니다. 국내에는 5, 6명밖에 없죠. 적은 인원 중 한 명이 나가서 수백 명 가운데 선발된 사람의 코를 꺾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기뻤습니다.”

그는 우승을 놓친 미국대표 티노씨의 17세 된 막내아들이 “줄타기를 더 배워서 자신이 생기면 겨루고 싶다”고 자신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며 흐뭇해했다.

권씨는 누구처럼 대대로 줄을 타는 집안 출신이 아니다. 한창 개구쟁이였던 열 살 때 줄타기를 처음 접한 것은 당시 농악대에서 활동하던 어머니의 욕심 때문이었다.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3m 높이의 외줄에서 떨어져 다치고 심지어 기절하기도 하면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29년간 줄타기 외길 인생을 걸어 온 권원태씨는 지금도 줄에 올라설 때마다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만큼 줄타기에서 자만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지방의 한 씨름대회에서 공연하고 있는 모습. -김미옥기자

“타악기는 묵으면 묵을수록 소리에 맛이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줄타기는 묵으면 묵을수록 실력이 줄어듭니다. 몸을 사리기 때문이죠. 줄타기는 지금도 겁이 납니다. 10년, 15년 전에는 줄 타면서 뒤로 한바퀴 도는 묘기도 부렸습니다. 지금은 하지 않습니다. 사설 재담 등 종합적인 면에서는 지금이 물론 낫죠.”

줄 위에 올라서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그는 타고난 재주꾼이다. 관객과 호흡을 맞추다 보면 어느새 두려움이 싹 사라진다는 것. 권씨는 손님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즉흥 재담을 즐기고, 때로는 적절한 음담패설을 가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줄타기 묘기를 하는 도중에 손님이 “그 사람 참 잘한다”라고 말하면 “잘하기는…. 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라고 대답해 웃음을 이끌어낸다. 줄타기를 하다 보면 줄에서 허공으로 뛰어오른 뒤 양 다리 사이에 줄을 끼고 걸터앉는 일도 있다. 이럴 때면 노인들 가운데 “거기 안 다쳤어”라고 묻는 이가 꼭 있단다. “내 거시기는 집에 떼어놓고 왔지요. 그런데 어르신은 그것 걱정하실 나이네요”라고 받아치면 또 다시 폭소가 터진다.권씨는 줄타기가 곧 인생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좋든 싫든 다 줄을 타면서 살아간다는 것. 줄을 끝까지 잘 타고 목적지까지 가면 성공이요, 중간에 떨어지면 실패라고나 할까.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인생의 줄을 타고 있다는 그는 이제부터 주변 정리를 시작할 계획이라고 한다. “앞으로 짧으면 5∼6년, 길어봐야 15년 정도 줄타기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제자 하나 잘 길러 내는 게 유일한 목표입니다.”

권씨는 우리의 전통 줄타기에 대해 자부심이 강하다. 줄 위를 걸어 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며 재담하는 줄타기는 서역에서 시작돼 중국 수·당 시대에 성행했고, 우리나라에는 신라시대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무형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서커스 묘기의 일종인 서양 줄타기와 달리 재담과 장단, 기술이 함께 어울린 종합예술이라는 점에 그는 주목한다.

“우리의 줄타기는 국제무대에 나가도 경쟁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언어 장벽입니다. 사설과 재담은 관객이 바로 알아들어야 제 맛인데 통역되기를 기다리면 맥이 빠집니다. 줄타기를 하면서 재담을 영어로 할 수 있는 제자를 키워 내면 외국에서도 한국 줄타기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안성=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권원태씨는

△1967년 부산 출생

△1976년 줄타기 입문

△1983년 경남 남해에서 중학교 졸업

△1995년 조영희씨와 결혼

△2002년 중국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 50주년 기념공연

△2003년 공연 중 다리 골절상으로 3개월간 깁스 신세

△2003년 남사당 바우덕이풍물단 상임단원

△2004년 미국 플로리다에서 열린 줄타기 대회에서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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