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쯤 충무공 영정이 잘못됐다는 신문기사를 우연히 읽었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하더군요. 당시 시대상 및 충무공과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보고 충남 아산 현충사 등으로 답사를 다녀보니 자연스럽게 기존 충무공 영정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 내려지더군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큰 인물의 영정이 잘못 그려졌다면 곤란하죠.”
현재 현충사에 모셔진 충무공 영정은 서애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에 입각해 1953년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작품이다. 이 영정은 20년 뒤인 1973년 10월 선현영정심의위원회에서 국가표준영정으로 지정됐다.
징비록은 충무공에 대해 ‘용모아칙(容貌雅飭)’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용모가 단아하고 조심스럽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무장답지 않게 선비처럼 그려졌다는 게 권 화백의 개인적 느낌이지만 국가표준영정으로 지정된 이상 용모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16세기 당시의 충무공 초상화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아산 현충사를 비롯해 전국 방방곡곡에 모셔진 충무공 영정의 얼굴이 다 제각각인 상황에서 얼굴에 집착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이다.
그 대신 권 화백은 영정 속에 나타난 복식(服飾), 즉 옷과 그 장식품에 주목한다. 얼굴이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복식은 시대별로 특징이 다르고, 충실하게 고증하면 실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1980년대 중반 조선시대 의상전시회에 참가하면서 옛 복식에 관심을 갖게 된 이후 학술발표회나 출토유물전시회, 전통의상 강연회 등에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익힌 덕분에 이제는 복식 전문가로도 꽤 이름이 알려져 있다. 그가 국내에서 가장 많은 국가표준영정 7점을 그린 전통인물화가라는 사실은 모르고 복식 전문가로만 알고 있는 이도 있을 정도다.
그는 특히 충무공 당대의 복식과 관련된 것이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찾아다녔다. 임진왜란 당시 경북 영천에서 의병을 모집해 영천성을 탈환한 권응수 장군의 영정이 국립진주박물관에 모셔져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공신으로 책정되면서 그려진 것이었다.
“충무공 영정의 흉배(관복의 가슴과 등에 붙이던 수놓은 헝겊 조각)는 경국대전 문헌에 나온 흉배는 물론 권 장군의 흉배와도 다릅니다. 두 사람은 당시 같은 무관 2품이었지요. 그런데 권 장군 흉배는 호랑이 한 마리와 구름무늬로 되어 있는데 반해 충무공 흉배는 위에 호랑이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앉아 있고 아래에는 파도무늬가 들어 있죠. 이런 흉배는 문헌에 없고 유물도 없습니다.”
연구를 거듭해보니 잘못된 건 흉배만이 아니었다. 충무공이 활동한 16세기에는 관복의 목 부위가 깊게 파이지 않았고 소매가 현재의 영정처럼 지나치게 넓지도 않았다는 것. 또한 족대(발판)와 바닥 문양이 당대 양식과 달랐다. 종합적으로 보면 영정 속의 충무공 복식은 3세기 뒤인 19세기 양식이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권 화백은 10년 전부터 틈틈이 자료를 수집하면서 초안을 잡아오다가 석 달 전부터 채색작업에 들어갔다. 폭 113cm에 길이 193cm의 비단 위에 천연 염료로 그리고 있는데 한 달 뒤쯤 완성될 예정. 하루 평균 10시간씩 작업하는 강행군이다.
“이 일은 국가표준영정처럼 누가 의뢰해서 하는 작업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죠. 보다 사실에 근접한 영정을 그리기 위해 충무공과 관련한 자료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갈 준비가 돼 있습니다. 왜군이 회군하던 상황에서 유탄에 맞아 순직한 충무공의 안타까운 최후가 저를 이 일에 계속 붙들어 매는 요인인 것 같습니다.”
권오창 화백은
△1948년 강원 강릉 출생
△1990년 개인전 ‘조선조 말기 복식과 초상전’
△1992년 통일신라시대 학자 설총 국가 표준영정 제작(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93년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 〃(〃)
△1998년 조선시대 궁중복식회화전
△2003년 백제 26대 성왕 국가 표준영정 제작(충남 부여군 정림사지 전시관 소장)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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