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밤 10시. 서울 대학로 아룽구지 소극장에서는 제문 읽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날은 극단 목화의 연극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의 공연 첫날. 첫 회 공연을 마친 뒤 연극의 성공을 기원하며 고사를 지내는 단원 40여명 중에는 극단 기획자인 일본인 기무라 노리코(木村典子·41)도 끼어 있었다.
“일본에서는 고사를 지내본 적이 없죠. 한국에서 극단 일을 하니까 이런 것도 배우네요.”
간혹 튀어나오는 어눌한 발음만 빼면 외국인 같은 느낌이 전혀 없다. 기무라씨는 10여 년 전 목화와 인연을 맺고 짬짬이 일을 거들다가 지난해부터는 아예 ‘전업’으로 이 극단의 기획팀에서 일을 시작했다. 공연의 기획과 홍보, 마케팅 등은 물론 세세한 살림살이나 대소사를 챙기는 것이 기획자의 일이다. 이날 고사 준비도 포함해서.
“한국의 연극을 알기 전까지 한국은 저에게 무거운 느낌의 나라일 뿐이었어요. 한국이라면 재일동포 문제, 위안부 문제 그런 것이 먼저 떠올랐으니까요. 그런데 한국 연극을 보니 일본과 정서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기무라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년 정도 일반 회사에 다니다 1983년부터 고향인 홋카이도(北海道) 아사히카와(旭川)의 연극기획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연극 기획자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할 즈음인 1991년, 도쿄 출장길에 우연히 연출가 오태석씨가 이끄는 극단 목화의 공연을 보게 됐다. 기무라씨의 표현에 따르면 ‘지금도 뭐에 감동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대단한 감동을 받고는’ 무작정 연극 뒤풀이 자리에 끼어들어 오씨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목화를 홋카이도에 초청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연출가가 ‘그렇다면 기념으로 셔츠 교환이라도 하자’며 땀에 찌든 티셔츠를 내줬습니다. 사실 전 그때 새로 산 실크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하하하.”
3년 후 기무라씨는 약속을 지켰다. 극단 목화는 그의 주선으로 아사히카와, 삿포로, 도쿄에서 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당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던 그는 이 초청공연으로 적자를 보게 됐다. 무리하게 일정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혼자서 빚을 갚아 나가는 모습이 불쌍해 보였던지 그 뒤 목화에서 가끔 공연 초청장과 비행기표가 왔어요. 그러다 한국 연극 대본을 원어로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독신인 그는 이 생각을 바로 실행에 옮겼다. 1997년 ‘가방 하나 달랑 들고’ 한국에 건너왔다. 연세대에서 한국어를 공부한 뒤 한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한국 극단의 일본 공연 기획에 참여하다가 아예 한국에 눌러 앉기로 하고 취업 비자를 받았다. 비자를 받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담당자들은 외국인이 굳이 ‘배고픈’ 연극계에서 일하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본의 문화 수준이 더 높은데 왜 한국에서 일하려 하느냐”는 말도 들었다.
이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그가 굳이 한국 연극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연극과 일본 연극은 달라요. 일본은 가볍고 일상적인 소재가 많아요. 스케일도 작고, 일시적인 즐거움을 추구하죠. 이에 비해 한국 연극은 인간의 본질에 더 다가가는 것 같아 여운이 오래 남아요. 그 대신 일본 연극이 대부분 어느 정도의 평균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데 반해 한국 연극은 작품마다 수준차가 많이 나는 것 같아요.”
그는 “조용한 일본 관객에 비해 훨씬 빠르고 선명한 반응을 보이는 한국 관객도 매력적”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앞으로 꿈은 ‘일본인 기획자’가 아닌 보통 ‘연극 기획자’로 평가받고 싶다는 것이다.
“연극 기획은 사회의 흐름을 잘 좇아가야 하는데 그런 점에선 외국인이니까 아무래도 좀 힘들죠. 앞으로 한국 기획자, 연극인들과 서로 자극을 주고받으면서 어울렸으면 하는 바람이에요.”주성원기자 swon@donga.com
기무라 노리코는
△1963년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아사히카와(旭川) 출생
△1983년 ‘아사히카와(旭川) 연극감상회’에서 연극 기획 시작
△1991∼93년 아사히카와 문예회관 연극 스태프 활동
△1994년 ‘태’ 일본공연 기획
△2000년 ‘춘풍의 처’ ‘아침 한때 눈이나 비’ 일본 공연 기획 참여
△2002년 ‘내사랑 DMZ’ 일본공연 기획 참여
△2003년 극단 목화 기획팀 제작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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