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우리말 지킴이 ‘한글문화연대’ 김영명교수

  • 입력 2004년 6월 6일 18시 04분


한글운동의 필요성을 열강하는 김영명 한글문화연대 대표. 그는 “지구상에 남은 6000여종의 언어 가운데 21세기 중반이면 절반이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국어를 지키는 운동은 결국 그 나라 문화력의 척도”라고 말했다.-원대연기자
한글운동의 필요성을 열강하는 김영명 한글문화연대 대표. 그는 “지구상에 남은 6000여종의 언어 가운데 21세기 중반이면 절반이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국어를 지키는 운동은 결국 그 나라 문화력의 척도”라고 말했다.-원대연기자
김영명(金永明·50) 한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쓴 책과 논문을 보면 어딘가 다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글 속에 영어와 한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영어나 한자를 병기하지 않아 단어의 의미가 헷갈리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 김 교수는 “그럴 때는 한글 표현을 바꿔서 쓴다”고 답했다. 한글운동을 하는 학자다운 ‘소신’이다.

김 교수는 4년 전 만들어진 시민운동단체 ‘한글문화연대’를 이끌고 있다. 영어 열풍에 휩싸인 한국사회에서 한글운동을 하다 보니 다른 시민단체들처럼 화끈한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 사무실도 한 벤처기업의 방 한 칸을 얻어 쓰고 있다. 그는 “국제화시대 한글운동의 현주소 아니겠느냐”면서 “요즘 우리말과 글을 쓰자고 주장하면 ‘구닥다리’ ‘국수주의자’로 몰리기 십상”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영어지상주의’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그는 요즘 바짝 화가 나 있다. 서울시의 ‘영어 상용화’ 정책 때문. 공무원들이 어설픈 영어로 회의를 진행하고 행정문서에 영어를 섞어 쓰게 되면 오히려 업무의 효율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렇지만 외국인들은 한국투자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영어 소통’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지 않는가. 이런 주장에 대해 그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한국사회에서 영어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닙니다. 외자 유치를 담당하거나 외국인과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지금보다 영어를 훨씬 더 잘 쓰고 많이 써야겠지요. 그러나 국민 전체가 영어에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한국사회 영어지상주의의 주범으로 엘리트 계층을 꼽는다. 여론을 주도하는 정치인, 관료, 경영자, 학자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자신들의 우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영어를 선호하면서 사회 전체에 ‘영어 못하면 뒤떨어진다’는 강박관념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 그는 “언어는 ‘힘의 논리’에 지배된다”면서 “젊은 세대가 ‘고루하다’는 선입관에서 벗어나 세계적 차원의 문화유산운동으로서 한글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설립 4년 만에 3000여명으로 늘어난 한글문화연대 네티즌 회원들을 보면서 ‘한글운동의 미래는 밝다’는 희망을 가진다.

한글운동은 그에게 학문적 시각을 넓혀준 ‘촉매제’였다. 그는 미국적 시각이 주류인 국내 정치학계에서 약소국의 관점에서 한국정치와 국제관계를 논해야 한다는 주장을 꾸준히 펼치고 있는 것.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 역시 젊은 시절에는 주류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한글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한국적 상황에서, 한국적 현실에 맞게 정치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그는 언어와 정치의 함수관계를 연구하는 ‘언어정치학’을 자신의 학문세계의 최종 정착지로 보고 있다.

정치학자가 한글운동으로 ‘외도’하게 된 사연을 묻자 그는 대학시절 얘기를 꺼냈다. 서울대 외교학과에 다닐 때 그는 영어, 일본어 단어와 문장을 어설프게 번역한 학술평론집을 접하면서 “쉬운 얘기를 왜 이렇게 어렵게 쓰나” 하는 불만을 갖게 됐다. 정확한 생각은 쓰기 쉽고, 말하기 쉬운 우리글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늘 국어사전을 옆에 끼고 다니며 국문학자들과 친하게 지내는 ‘별종’ 정치학자였다.

1990년대 말 그는 본격적으로 ‘한글운동권’에 뛰어들었다. 세계화 열풍이 거세지면서 영어교육에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던 때였다. 그는 평소 친분이 있던 개그맨 정재환씨와 의기투합해 한글문화연대를 만들었다. 정씨는 현재 부대표를 맡고 있고 아나운서 임성민씨, 시인 고경희씨 등도 열성적인 회원이다.

요즘 한글문화연대는 7월부터 ‘B’ ‘G’ 등 영어로 표기되는 서울시 버스노선 표기방식을 ‘지선’ ‘간선’ 등 한글로 대체해야 한다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외래어가 난무하는 서울시내 간판들을 바로잡기 위해 한글맞춤법 책자를 발간해 상점들에 나눠주는 작업도 하고 있다.

김 대표는 “한글운동이 좀 더 힘을 얻기 위해서는 참여연대, 경실련 등 주요 시민단체들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민단체들이 정치 현안에만 매달리지 말고 민족 주체성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문제에도 눈길을 돌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김영명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1954년 경남 마산 출생

△경기고등학교,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뉴욕주립대 정치학 박사

△현 한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겸 국제학대학원장

△한글문화연대 대표(2000년∼)

△저서 ‘고쳐쓴 한국현대정치사’ ‘나는 고발한다-영어 사대주의 뛰어넘기’ ‘우리 눈으로 본 세계화와 민족주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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