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기자의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갑자기 “재밌지? 재밌지?”하는 그의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작업실을 쩌렁쩌렁 울린다. 그가 자신의 매니저이자 장조카인 켄 백(한국명 백 건·白健·54)씨의 셔츠 앞뒤에 마구 붓질을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어린아이 그대로다. 쉰 넘은 조카도 삼촌 앞에서 재롱을 피우듯 “여기도 그려 달라. 저기도 그려 달라”며 장난을 친다.
백남준은 이어 옆에 있던 피아노로 캔버스를 옮겼다. 빨강 파랑 노랑 원색의 물감을 잔뜩 묻혀 피아노 여기저기에 붓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이틀 뒤 6일 오전에 펼쳐질 ‘존 케이지에게 바침’ 퍼포먼스에서 때려 부술 중고 피아노다. 붓질이 끝나자, 그는 언제 그랬느냐 싶게 피아노 앞에 차분히 앉아 건반을 두드렸다. 뜻밖에도 ‘아리랑’이 흘러 나왔다. 오른손으로만 치는 연주이건만 힘이 넘치고 정확했다.
나이가 들수록 한국이 더 생각난다는 그가 연주하는 아리랑. 한국이 낳은 세계적 예술가, 비디오 예술의 아버지, 행위예술가, 테크놀로지 사상가 등 그의 이름 앞에 따라붙는 숱한 수식어들을 뒤로 한 채 일흔을 넘긴 이 세계적 거장은 낡은 옷차림에 휠체어 신세를 진 채 아리랑을 치고 있다. “애국이 따로 없다. 유명해지는 게 애국이다”라고 말해왔던 세계인 백남준. 그도 이제는 돌아갈 곳을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네 평 남짓한 작업실은 “평생 유일하게 실패한 일이 돈을 못 벌었다는 것”이라는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허름했다. 가구는 오래되었고 의자들은 등받이가 해져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작가가 소장한 작품도 양옆으로 3대씩 길게 붙인 벽걸이 TV 6대에서 한국과 미국의 이미지들이 상영되는 ‘메타11’과 과거 작품 ‘TV 로봇’ 등 6점에 불과했다. 벽에는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하루 2∼3시간씩 그렸다는 드로잉 신작들이 보였다. 그와 절친했던 요셉 보이스 사진에 자신의 커다란 사인을 한 작품들, 어린이가 그린 것처럼 눈 코 입을 간단한 선으로만 표현한 작품들이 요즘 그의 마음상태를 짐작케 한다.
“건강이 어떠시냐”고 묻자 그는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했다. 조카와는 영어로 대화를 나누던 그가 한국말이 들려오자 한국말로 답을 해 준다. 그는 이곳 작업실과 휠체어로 10분가량 걸리는 집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이번 행사에 대해 묻자 그의 입에서 몇 마디가 흘러 나왔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조카가 보충설명을 해줬다.
“본래, 정신적 스승인 존 케이지가 태어난지 꼭 100년이 되는 2012년에 추모 이벤트를 하려 했는데 건강을 장담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셨나 봐요.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스승을 추모하고 당신 예술과의 만남을 환생시키는 일을 해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백남준은 평소 전위음악의 대가 케이지와의 만남을 통해 자기 인생이 바뀌었다고 자주 말해 왔다.
케이지는 전통악기 대신 플라스틱, 새털, 장난감 인형 등으로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연주해 종래 음악의 정의를 해체시킨 인물이다. ‘소음도 음악’이라는 그의 철학의 바탕은 동양적 선불교에 있었다. 그의 주장과 음악은 백남준으로 하여금 기성 가치나 제도에 대해 예술가가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했다. 백남준이 서양의 전통악기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때려 부쉈던 퍼포먼스는 거기서 비롯됐다.
일흔을 넘긴 제자가 다시 펼쳐 보일 ‘피아노 부수기’ 퍼포먼스는 그가 몸과 정신으로 스승을 추모하는 굿판이다. 1990년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 현대 뒷마당에서 연 ‘요셉 보이스를 위한 진혼굿’ 이후 퍼포먼스는 처음이다.
백씨는 12월 말 경기 성남시 분당구에 자신의 작업실(92평, 2층)을 연다. 비디오 작품들과 작가의 소장품을 비롯해 면도기, 전화, 휠체어 등 개인 생활용품을 갖다 놓고 일반인에게도 공개한다. 백씨가 이에 대해 조각 단어 영어로 뭐라고 말하자 조카가 이렇게 통역했다.
“몸이 건강하면 한국에서 작업하고 싶다. 그러나 힘들 것 같다. 비록 한국에 가지는 못해도 한국과 한국사람들에 대해 갖고 있는 사랑과 정을 전하기 위해 작업실을 만들었다.”
그의 몸은 비록 묶였으나 정신은 자유롭고 명료해 보였다. 어쩌면 남은 생의 전부를 오로지 ‘예술’ 한 곳에만 집중하는 듯 보였다.
투병 중에도 2000년 2월 뉴욕 구겐하임 회고전을 치렀고 이듬해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순회전, 2002년 월드컵 개막식 작품을 거뜬히 해치웠다. 요즘도 몸이 허락하면 책상 앞에 앉아 오른손으로 무수히 드로잉을 한다. 조카는 며칠 전 커다란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자신의 도시락에 삼촌이 ‘US Buddha’라고 써 넣었다며, 요즘에는 무엇이든 캔버스 삼아 재치 있는 말 한 마디를 적어 넣는다고 전했다.
얼마나 더 사시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나우, 아이 엠 소 베리 해피(Now, I am so very happy).” 기자에게는 그 말이 ‘내가 곧 죽을 것 같지? 하지만 난 아직 멀쩡해’라는 말처럼 들렸다.
백남준은 오른손을 흔들며 이마를 살짝 몇 번 건드린 뒤, 코에 대고 엄지손가락을 움직이는 특이한 작별인사를 했다. 그의 코믹한 행동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문득 그의 불편한 몸동작조차도 한 편의 퍼포먼스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뉴욕=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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