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서울 강남구 청담동 우림청담씨어터에서 막을 올리는 연극 ‘위트’에서 난소암으로 죽어가는 50대 영문학교수 역을 맡은 윤 씨는 암 환자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턱선 아래까지 길렀던 머리를 0.5cm만 남긴 채 모두 잘라버린 것.
19일 오전 11시. 청담동 ‘박준 미용실’에 나타난 윤 씨가 거울 앞에 앉자 가위를 든 박준 원장이 다가와 거울을 등지고 앉도록 의자를 돌려놓으며 말했다. “거울을 보면 슬퍼할까봐.”
소감을 묻자 윤 씨는 “제의(祭儀)를 지내는 것 같다”고 살짝 웃는 여유를 보였다. 그러나 막상 박 원장의 가위질에 오른쪽 옆머리부터 뭉텅뭉텅 잘려나가자 눈가가 약간 젖어들더니 마침내 바리캉으로 머리를 밀기 시작하자 주르륵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그동안 검게 염색했던 단발머리는 어느새 모두 사라지고 0.5cm 길이의 하얗게 센 원래의 머리칼만 남았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흰 머리칼에 놀라자 그녀는 “리얼(real)하죠?” 라고 말했다.
박 원장이 “두상이 참 예쁘다”며 “초등학교 6학년 같네” 하고 위로하자 윤 씨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쓰다듬더니 “남자 같다”며 조금 웃었다.
―삭발한 이유는….
“말기 암 환자니까 머리가 다 빠져야 되죠. 연출자는 마음이 약해져서 가발 얘기도 꺼냈지만 그건 싫었고…원래는 민머리처럼 다 밀어버리려고 했는데 그러면 매일 면도를 해야 하는 문제도 있고, 또 제가 제 (흰)머리를 아는데, 오히려 이렇게 깎는 것이 50대 배역의 모습에 더 어울릴 것 같아요.
―머리를 자를 때 무슨 생각이 들었나요.
“지금까지 전 배우로서 최선 이상을 하며 살아왔어요. 아직까지 이렇게 배우로서 머리를 깎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좋습니다. 하지만 남편이나 아이를 생각하면…여자로서, 인간으로서는 스스로에게 연민도 느껴져요. 아이 앞에서는 이제 스카프를 쓰고 있어야겠네.”
윤 씨가 머리를 삭발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1995년 ‘덕혜옹주’ 출연 이후 꼭 10년 만의 일.
―재작년 돌아가신 어머니도 난소암을 앓으셨는데….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하며) 머리 자를 때 어쩔 수 없이 엄마 생각이 나서 울었어요. 우리 엄마는 두상도 정말 예쁘셨는데…이번 작품을 하면서도 엄마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돼요.”
올해로 배우생활 30년째. 1975년 연극 ‘꿀맛’으로 데뷔한 그녀는 “그때 그 ‘꿀맛’ 때문에 30년간 연극의 ‘쓴맛’을 보고 살고 있다”며 웃었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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