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경기]피플&피플즈/‘인천학생 6·25참전관’ 이경종 관장

  • 입력 2005년 4월 30일 00시 08분


코멘트
인천 중구 신포동(답동 성당 건너편)에 가면 ‘인천학생 6·25 참전관’이란 흰색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의 관장은 인천 학도병 출신인 이경종(71) 씨.

1995년 겨울. 이 씨는 6.25전쟁 당시 생긴 허리 병이 도저 병원에 입원한다. 병실에서 신문을 읽던 그는 한 귀퉁이에서 ‘6·25 참전용사 증서’를 발급한다는 기사를 발견했다.

곧장 병무청에서 병적증명서를 떼 국가보훈처에 냈다. 얼마후 증서 한 장이 전달됐다. 학도병 참전 증서였다.

“16살 때 형을 따라 학도의용군에 들어갔어요. 20살에 제대해 인천에 돌아왔을 땐 가정이 어려워 복학을 못했죠. 뒤늦게 정부가 준 증서 한 장이 오히려 허탈감을 주더군요.”

이 씨는 그 때 ‘우리가 나라를 위해 한 일’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학도병으로 함께 참전했던 선후배를 한명씩 찾아 나섰다.

환갑을 넘긴 ‘소년병’의 참전기(參戰記)는 이렇게해서 쓰여지기 시작됐다.

최근까지 10여 년간 300여 명의 학도의용대 출신을 만났다. 당시 상황을 회상하는 육성을 녹음하고 색바랜 사진을 얻었다.

아들 규원(43·치과원장) 씨의 도움을 받아 1997년 2월 ‘인천학도병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를 구성해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갔다.

“1950년 6월 26일 저녁, 인천의 학련(學聯) 출신 학생과 학도호국단 학생 40여 명이 자발적으로 이계송(작고·당시 고려대 2학년) 씨의 집에 모여 전인천학도의용대(全仁川學徒義勇隊)를 조직했어요.”

이들은 7월 4일 북한군에 의해 인천이 점령될 때까지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의 길을 안내하고 학생 선도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15일)으로 인천이 수복되자, 흩여졌던 조직을 정비했다. 그리고 1950년 10월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그 해 12월 18일 인천 중구 축현국민학교에 집결키로 했다.

여학생 70여 명을 포함해 5000여 명이 넘는 학생이 모였다. 대학생도 있었지만 14∼18세가 대부분이었다.

이들 속에는 당시 인천상업중학교(현 인천고등학교, 당시 6년제) 3학년에 다녔던 이 씨도 포함돼 있었다.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형 기종 씨(작고)를 따라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선 것. 그는 그 길이 가장 옳은 길로 알았다.

해질 무렵 행군을 시작해 수원역에서 화차(貨車) 지붕에 몸을 싣고 부산에 도착했다.

일부는 해병대원으로, 대부분은 보병으로 전투 현장에 투입됐다. 이 중 208명이 전투현장에서 꽃다운 나이에 스러져갔다.

이 씨는 “인천학도의용군의 발자취를 찾던 과정에서 영종도에서 한 전사자(김우종 씨)의 유골을 수습해 대전 현충원 국립묘지에 안장한 것이 가장 보람있었다”고 말했다.

이 씨가 개관한 ‘인천학생 6·25 참전관’에는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있지만 어린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의용대원들의 빛바랜 사진 1000여 점과 각종 기록들이 전시돼 있다.

매주 토요일(오전 10∼오후 5시)에 문을 열지만 미리 연락하면 평일에도 이 씨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할 수 있다. 032-772-1218

차준호 기자 run-jun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