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지금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를 보시는 겁니다. 운도 참 좋으십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독도 해돋이를 보고 싶어 하는데, 초행에 해돋이도 보시고 입도(入島)까지 하시다니 말이지요. 하하….”
그때는 그게 행운인지도, 자신의 삶을 바꿀 운명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지금까지 그는 20여 차례 독도를 향했고, 그 가운데 9번 입도에 성공했다. ‘세상을 관장하는 절대자의 존재’를 강하게 믿고 있는 기독교인인 그는 독도만 생각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어떤 강한 힘’을 더욱 절실하게 체험한다.
‘품에 꼭 안고 싶다. 보라색 안개로 띠를 두르고 금세 용광로에서 흘러내린 듯한 기암, 독도. 너무 급한 마음에 타고 가던 거룻배에서 훌쩍 물 속으로 뛰어들어 첫발을 내디뎠다.… 독도의 산천이 이리도 아름다웠던가. 동도(東島)가 수줍어 엎드렸는데 서도(西島)가 고개 들고 망을 보는 자세다.’(답사기 중)
그는 신들린 사람처럼 화선지 위에 독도를 그려댔지만 벅찬 가슴이 후련해지질 않았다고 한다. 가슴만 터질 뿐, 독도를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었다. 어이하랴, 발아래 흙이라도 발라봐야지. 그는 캔버스에 독도의 흙을 바른 후에야 비로소 재현되는 영기(靈氣)를 느꼈다고 한다. 독도 땅을 밟은 최초의 화가답게 그는 그 후 500여 점에 이르는 독도 그림을 그려 왔다.
그림은 단지 페인팅이 아니라 ‘쓰는 것’이라고 믿는 그가 한국 정신의 뿌리를 그림에서 찾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 고구려 벽화까지 거슬러 올라간 그는 1970년대부터 전국의 산하를 돌아다니며 한국의 진경(眞景)을 찾아 헤맨다.
“가장 아름다운 한국미의 원형, 그것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라는 화두를 붙잡고 미친 듯 돌아다녔지요.”
불혹을 바라보던 1977년. 그는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힌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 해안과 도서를 그린 진경이 왜 없을까. 이 화백은 ‘남들이 안 한, 섬을 그리자’는 생각에 전국의 섬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급기야 독도에서 그 종착점을 맞는다.
“독도는 볼 때마다 달라요. 천의 얼굴을 하고 있지요. 작년에 봤을 때 다르고, 계절마다 달라요. 자연을 빌려서 축소해 놓은 잘생긴 수반석(水盤石) 같다고나 할까. 자연의 오묘함과 신(神)의 조형미가 완벽하게 어우러진 창작물입니다.”
이 화백은 첫 독도 입도 이후 기회가 날 때마다 화가 시인들과 함께 독도행을 주선해 독도를 소재로 한 시와 그림들을 남기도록 독려했다. 그런 그가 올해에는 광복 60주년을 맞아 화가 60명으로 구성된 독도지키기 ‘문화 의병’을 조직하고 대장이 되었다. 문화재청과 해양경찰청 후원으로 21일부터 2박 3일간 독도에서 ‘역사와 의식, 독도 진경’을 주제삼아 화가 민경갑, 함섭, 박광진, 박성태 씨 등과 함께 스케치 작업 등을 진행할 계획이다. 이 그림들은 11월경 경향갤러리에서 전시된다.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은 다 알지만 마음속에 얼마나 신념으로, 정신으로 품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진정 내 것이라면 사랑하고 가꾸는 법이지요. 그동안 독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호적에는 올려놓고 자식을 돌보지 못한 무책임한 가장에 비유하면 지나칠까요.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저들(일본)이 바라는 것은 우리의 정치적 과잉반응이며 심리적 동요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잠꼬대처럼 무시하고 대신, 얼마나 그 섬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면 됩니다. 이런 연장선에서 우리 화가들은 무장하고 보초를 서거나, 주민등록을 옮기거나, 생태환경운동을 벌이는 대신 독도를 그리고 또 그릴 겁니다.”
허문명 기자 angel@donga.com
●이종상 화백은
△1938년 충남 예산 출생
△1963년 서울대 동양화과 졸업
△1976∼80년 동국대 대학원 철학과 석박사
△1978년 서울 동산방화랑에서 첫 독도 개인전
△1991∼2003년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
△2002∼2003년 서울대 미술관 관장
△2003년∼ 서울대 명예교수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