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서를 낼 때만 해도 이렇게 연주회 요청이 많이 쏟아질 줄은 몰랐어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피아노 연습과 연주에만 전념하고 싶었는데 잘된 것 같아요.”
전화기 저편에서 간간이 그녀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계속되는 강행군 속에 호텔 에어컨 바람에 감기가 들었기 때문. 베네수엘라 독주회 때는 입속에 기침 안 나오는 사탕을 물고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
여성 연주자로선 보기 드문 호쾌한 타건과 정교한 테크닉으로 인정받는 백 씨는 체력과 집중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991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했을 때 22시간 동안 쉬지 않고 연습한 뒤 심사위원 앞에서 연주를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와 그대로 쓰러진 일은 유명한 일화.
백 씨는 1994년 6월 세계적인 권위의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1위 없는 3위로 입상하며 한국 국적을 가진 최초의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입상자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그해 29세의 나이로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임용돼 일약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한번 연주여행을 가면 20일이 보통이어서 제자들이나 동료 교수님들께 너무 미안했습니다. 10년간 학교라는 조직에 머물며 정작 연주가로서는 마지막 단계까지 못 가봤다는 생각에 불안했어요. 열매와 가지, 뿌리까지 모두 한 종류의 사람이 돼야 하는데, 나에게 너무 이것저것 많이 입혀지다 보니 나 자신의 정체성은 과연 뭘까에 의문이 들어 결단을 내렸죠.”
백 씨는 요즘 연주여행이 없을 때는 미국 뉴욕에 있는 아파트에서 두 아이를 키우고, 아파트 옆 동에 마련한 개인연습실에서 새로운 레퍼토리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 베토벤 소나타 ‘월광’과 ‘고별’, 쇼팽의 ‘에튀드’ 25곡 전곡 등 친숙한 곡을 골랐다. 화려한 테크닉보다는 40대의 선 굵은 원숙함과 자신만의 색깔, 감동을 담은 연주를 보여주겠다는 의도다.
“30대에는 사회생활이나 인생이 내 생각대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40대가 되면서 인생의 가치관이 확실해졌기 때문에 좀 더 과감해졌습니다. 그래서 사표도 냈고요. 앞으로 연주에서도 제가 믿는 쪽으로 좀 더 밀고 나가는 도전을 할 겁니다. 이제 더는 ‘손가락 엄청 잘 돌아간다’는 말로 칭찬 받을 나이가 아니니까요.”
서울대는 최근 또다시 29세의 촉망받는 바이올리니스트 백주영 씨를 교수로 임용했다. 백혜선 씨는 “10년 뒤 백 선생의 모습이 어떨지 매우 궁금하다”며 “그러나 백 선생은 중학생 때 유학을 갔던 나보다는 좀 더 한국 상황에 익숙하기 때문에 자신의 연주 실력을 키워나가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잘 조화해 나갈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번 독주회는 25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 28일 서울 충무아트홀 대극장, 11월 4일 대전 충남대 정심화홀, 11월 7일 경기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051-747-1536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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