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까지만 해도 남극에 다시 돌아갈 거라곤 믿지 않았죠.”
김예동(51) 한국해양연구원 극지연구소장은 고생 끝에 도착한 낯선 하얀 대륙이 ‘평생지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꼭 다시 돌아올 테니 한번 두고 보라”며 웃던 미국인 지도 교수의 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산과 여행이 너무 좋아 지구를 좀 더 공부해보고 싶어 선택한 전공이었지만 남극 연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29세였던 한 청년은 그렇게 한국 최초의 남극 방문자로 기록됐다.
“세상이 온통 하얗고 파랬어요. 단조로울 것만 같지만 눈을 꿰뚫고 뿜어져 나오는 남극 활화산의 증기는 정말 역동적이었죠.”
하지만 그의 첫 남극 탐험의 시작은 순조롭지 못했다. 1983년은 그에게 참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한 해였다. 당시 항공기관사로 근무하던 김 소장의 형은 옛 소련 전투기에 피격된 대한항공 여객기에 타고 있었다. 남극에 첫발을 내딛기 불과 석 달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자식을 잃을 수는 없다”던 부모님의 만류를 무릅쓰고 미지의 세상을 밟았다.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아마도 형의 보이지 않는 격려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삶의 전환점을 맞을 때마다 먼저 세상을 떠난 형을 떠올립니다.”
3개월간의 첫 탐험은 그가 남극의 가능성을 발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살아있는 대륙 남극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경험담을 신문에 기고했고 지인들에게도 알렸다. 남극은 더는 미지의 땅이 아닌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곳이라고.
1987년 그는 척박한 연구 여건에도 불구하고 선뜻 고국의 극지 연구에 동참했다. 극지야말로 자원빈국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소신 때문이었다. 남극 세종기지에서 첫 겨울을 날 월동대가 사용할 물품 하나하나를 챙기는 것부터 기지설계까지 모두 그의 몫이었다.
두 번의 월동대장, 스무 번이 넘는 남극 방문을 경험한 그의 이름 뒤엔 언제나 ‘세계적인 극지전문가’라는 비공식 직함이 따라 다닌다.
○ 북극 다산과학기지로 또다른 도전
김 소장에게 남극이 탐험의 종착지는 결코 아니다. 2001년 그는 약육강식의 국제질서가 지배하는 ‘야생의 설원’ 북극이라는 새로운 미지로 여행을 시작했다. 이미 강대국들이 많은 자리를 차지해 개발 주도권을 쥔 상황에서 무사히 북극에 진출할 수 있었다. 북극 다산과학기지는 그 결과로 세워졌다. 한국의 극지연구팀이 18년간 극지 연구에서 보여 온 열정이 비로소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셈이다.
예상외의 수확도 얻었다. 1992년 1월 김 소장의 연구팀은 세종기지가 위치한 남극 주변 해저에서 국내 연간 천연가스 소비량의 300배에 달하는 가스수화물층을 발견했다. 가스수화물은 얼음 속에 갇혀 있는 메탄가스를 말하는데 발굴만 되면 현재의 에너지 고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기대를 모으고 있다. 연구팀은 2003년 7월 북극 오호츠크 해 일대에서도 가스수화물층을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년의 반은 낮, 반은 밤인 땅. 대낮에는 세상이 온통 하얘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화이트아웃) 갑자기 몰아치는 눈 폭풍(블리자드)의 매력에 쏙 빠져 버린 한 청년 과학도는 어느새 하늘의 뜻을 아는 중견 과학자가 됐다. ‘더위보다 추위가 백배 낫다’는 그는 지금도 1년에 한번쯤 하얀 대륙 남극의 땅을 걸어본다.
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unta@donga.com
■김예동 박사는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77년 서울대 지질학과를 졸업하고 1987년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에서 지구물리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하얀 대륙 남극에 첫발을 들여놓은 뒤 20년 이상 남극과 북극을 오갔다. 1987년 남극 세종과학기지를 세우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고 월동대장을 두 차례나 지냈다. 2002년 국제북극과학위원회 한국대표를 맡아 북극 다산과학기지 건설을 주도했으며 현재 한국해양연구원 극지연구소장 및 대한지구물리학회장으로 있다.
■청소년에게 한마디
두려움을 떨치고 변화의 바람에 몸을 내맡겨라. 탐험가와 마찬가지로 과학 역시 도전 정신이 필수다. 남들이 모두 가는 길에서 얻을 것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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