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디자이너]<5>아트디렉터 서기흔 씨

  • 입력 2005년 12월 2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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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는 것도 사진을 찍는 것도 아니다. 글꼴을 만들지도 않으며 글을 쓰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없으면 출판 인쇄물을 볼 수 없다. 바로 출판 디자이너다. 출판 디자이너는 글과 글꼴, 사진과 그림을 운용해 메시지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일을 한다. 메시지를 단순히 전달만 하는 게 아니라 아름답고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전하기 위한 총체적인 지면 계획을 세우기 때문에 이들을 ‘아트 디렉터’라고도 한다.

서기흔(52·아이앤아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사진) 씨는 이상철 안상수 정병규 씨와 함께 국내 출판계의 1세대 아트디렉터다.》

○ 아트디렉팅 시스템을 체계화하다

1980년대 초반 디자인을 전공한 이들은 대개 대학 졸업 뒤 광고회사에 취직했다. 광고 디자인계의 수요도 많았고 체계도 잡혀 있었다.

SK텔레콤 사외보 ‘it’의 표지. 2003년부터 지금까지 서기흔 씨가 제작하고 있다.

그러나 출판 디자인계는 초라했다. ‘디자인’ 행위가 있었으나 독서 환경을 조성하거나 책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아름답게 전달하는 체계는 거의 잡혀 있지 않았다. 최소한의 디자인만 있었을 뿐 ‘아트 디렉팅’은 없었던 것이다. 이상철 안상수 씨 등 선구자들이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서 씨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출판 디자인계에서 화가나 출판인이 하던 단행본 표지를 그래픽 디자이너의 전문 영역으로 바꾸었다. 기업 사보를 제작하면서도 일러스트레이션을 글의 보조 수단이 아닌 지면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성표 이인수 황성순 씨 등 역량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을 뒷받침했다.

○ 서기흔이냐 아이앤아이냐

그가 1979년부터 디자인한 단행본 표지가 2000권이 넘는다.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 ‘개미’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태백산맥’ ‘임꺽정’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 등 베스트셀러가 그의 작품이다.

그는 기업 사보나 브로슈어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90년대 초반 제일기획은 삼성그룹 사외보를 기획하고 디자인할 전문가를 찾고 있었다. 당시 담당은 이 분야에 명성이 높은 서 씨와 ‘아이앤아이’라는 업체를 놓고 저울질하다가 서 씨에게 맡기자며 그를 찾아갔는데 알고 보니 그가 아이앤아이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에피소드는 서기흔 브랜드의 명성을 드러내 주는 사례다. 이후 아이앤아이는 삼성그룹 사외보 ‘인재제일’, 삼성문화재단 사외보 ‘문화와 나’를 비롯해 기업 인쇄홍보물 분야의 대형 프로젝트들을 한동안 독식했다.

“서기흔이야말로 내용과 형식, 양수를 튼튼하게 갖춘 아트디렉터”라는 편집인 백순기 씨의 평가처럼 그의 성공에는 글(내용)에 대한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디자인이 있다.



○ 프로젝트에 투쟁사를 남겨라

“육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고난을 자청해야 세상 앞에 우뚝 서는 연습이 가능하다.” 서 대표의 이 말은 디자이너의 프로 정신을 담고 있다. 디자이너들이 “우리는 세상의 비주류이고, 디자인으로 세상을 어떻게 해볼 수 있겠어”라고 체념할 때도, 그는 늘 그들을 설득하고 의미있는 디자인을 던지려고 고난을 자청해 왔다.

서기흔 씨가 이끄는 아이앤아이가 만든 기업 사외보들. 삼성 문화재단의 ‘문화와 나’, 삼성그룹의 ‘인재제일’, SK텔레콤의 ‘it’ 등.

경원대 시각디자인과 교수이기도 한 그는 학생을 가르치는 일도 디자인 작업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그는 “학생은 훌륭하다” “학생을 두려워하자” “습관적으로 가르치지 말자” 등 자기 다짐의 명제를 연구실에 붙여 놓고 지낸다. 수업 준비를 위해 밤을 새운 일도 많다고 한다.

그가 내다보는 미래의 디자이너는 문화 생산자다.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콘텐츠의 시각적 형식은 물론 내용까지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몸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고난을 자청하는 이유는 문화 창조자로서 느끼는 책임의 무게 때문이다.

“디자이너는 모든 프로젝트에 투쟁사를 남겨야 한다. 처절하고 철저하고 섬세한 작업을 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고객이 감동한다.”

김 신 월간 ‘디자인’ 편집장 kshin@design.co.kr

사진 제공 디자인 하우스·박기숙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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