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언준(申彦俊) 동아일보 상하이(上海)특파원의 아들로 1931년 부친의 임지에서 태어난 고인은 평양에서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김일성종합대를 잠시 다니다 1·4후퇴 때 남한으로 피란을 내려왔다. 국민방위군 장교로 복무하다 고려대 철학과에 입학한 고인은 프래그머티즘과 화이트헤드의 사상 등 영미철학을 전공했다.
고려대 강사시절이던 1960년부터 ‘사상계’의 편집위원을 거쳐 편집국장을 맡았던 고인은 국내에 서양철학의 흐름을 꾸준히 소개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고 박종홍(朴鍾鴻) 서울대 교수와 함께 한국사상연구회를 창립해 학회지인 ‘한국사상’을 펴내며 한국철학의 주체적 확립에도 큰 기여를 했다. 서양철학을 전공한 고인의 고려대 박사학위 논문이 ‘신채호의 역사사상 연구’였다는 점이 이를 웅변적으로 뒷받침한다. 고인의 한국철학 연구의 대표작으로는 ‘동학사상의 이해’(1995년)가 꼽힌다.
또한 젊은 시절 북한에서의 공산주의체제 경험은 그를 투철한 반공 사상가로 만들었다. 고인은 ‘사상계’ 주간을 맡았던 양호민(梁好民) 한림대 석좌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사상과 북한의 주체사상을 정밀하게 비판해 온 대표적 학자로 꼽힌다. 1993년 출간된 ‘북한주체철학연구’는 그 대표작.
영미철학을 바탕으로 한 자유주의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산주의에 대한 준열한 비판의식은 시장경제를 옹호한 경제철학자 하이에크의 철학연구로 발전해 ‘시장의 철학’(2001년)을 집필하기에 이르렀다.
또 정치, 사회, 역사, 가치관 등 여러 주제에 걸쳐 깊이 있는 지식과 냉철한 통찰을 담은 칼럼을 신문에 게재해 명칼럼니스트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학문에 대한 고인의 열정은 2005년 초 암 말기라는 것을 뒤늦게 발견해 투병생활로 어쩔 수 없이 붓을 꺾어야할 때까지 계속됐다. 2004년 12월 말 나란히 펴낸 ‘뉴 라이트와 시장의 철학’과 ‘북한 주체사상의 형성과 쇠퇴’가 마지막 저작이 된 점이 이를 보여 준다.
제자인 정인재(鄭仁在) 서강대 교수는 “선생님은 고려대 철학과 출신 제자들과 함께 1980년대 초반 현대사상연구회를 창립하신 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두 달을 제외하고 매달 이어진 발표회에 빠짐없이 참석해 강평과 격려의 말씀을 아끼지 않았다”며 고인의 성실한 연구 자세와 제자 사랑을 그리워했다.
고인은 독일철학회상, 서우철학상, 성곡학술문화상, 국민훈장 목련장 등을 받았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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