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1월 31일 금요일 오전 8시 10분. 레바논 주재 한국대사관의 도재승(都在承·당시 44세) 2등서기관이 탄 푸조 승용차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대사관 앞에 다다랐다. 갑자기 연녹색 벤츠 승용차가 차 앞을 막아섰다. “…?”
눈 깜짝할 사이에 벤츠 문이 열리고 검은색 복면을 쓴 괴한 네 명이 튀어나왔다. 소련제 기관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괴한들은 운전대를 잡은 신참 행정관은 놔둔 채 도 서기관만 강제로 끌어내 벤츠 트렁크에 가뒀다. “다다다….” 그제야 처음 총성이 울렸다. 범인들이 푸조 차의 앞바퀴를 주저앉히는 소리였다.
광복 후 처음 일어난 외교관 피랍사건에 온 국민은 경악했다.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가 치열한 내전을 펼쳐 온 레바논이었지만 어느 쪽이나 한국 외교관을 노릴 이유는 없어 보였다.
곧 ‘리비아 정부의 지원을 받는 투쟁혁명 세포’라고 신원을 밝힌 한 단체가 도 서기관을 납치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연락 창구는 물론 정체조차 알 수 없었다.
인질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답답한 8개월여의 시간이 흐른 뒤 드디어 협상을 위한 ‘접촉선’이 연결됐다. 예상했던 대로 요구 조건은 ‘돈’이었다. 지루한 협상 끝에 도 서기관이 풀려난 것은 납치된 지 1년 9개월 만인 1987년 10월이었다.
10년여가 지난 뒤인 1998년 1월, ‘신동아’는 흥미로운 ‘발굴 비화’를 소개했다. 전두환 정권이 도 서기관의 몸값으로 약속한 절반의 돈은 내놓지 않고 떼먹었다는 것이다. 일이 풀려 간다는 생각이 들자 한국 정부는 도 서기관이 풀려나기도 전에 돈 내놓기를 중단했고 중간에서 ‘선금’을 전달한 유럽인들만 돈을 떼였다는 것이다. 이 비화는 교섭 과정에 참가한 한 미국인의 증언으로 알려졌다.
풀려난 도 서기관은 외교 업무에 복귀해 주뭄바이 총영사 등을 지냈다. 1997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다 총영사로 부임하면서 10년 만에 중동에 다시 발을 디딘 그는 당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납치의 고통은 그때 그것으로 잊고 싶다’며 피랍 당시의 일은 회상하기도 싫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2000년에 퇴임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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