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공감]생태정치학자 문순홍씨 추모식

  • 입력 2006년 2월 21일 03시 09분


故 문손홍 씨
故 문손홍 씨
“섭섭하게/그러나/아주 섭섭지는 말고/좀 섭섭한 듯이,//이별이게,/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어디 내생에서라도/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권농동 밝은사회국제클럽 5층 강당. 은은한 향초 냄새 속에서 나직한 시낭송이 울려 퍼졌다. 서정주의 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였다.

이 시는 지난해 1월 28일 48세를 일기로 타계한 문순홍 대화문화아카데미 바람과물 연구소 소장의 일기에 적혀 있던 시였다. 한국의 생태정치학을 개척한 선구자였으며 환경·여성운동가들의 큰언니였던 그의 요절을 예견하기라도 한 것 같은 시구는 추모객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학자로서 전성기에 암이라는 복병을 만나 숨진 그의 1주기를 맞아 열린 이날 ‘추모식 및 유고선집 출판기념회’에는 그를 아꼈던 선후배와 동료 50여 명이 모였다

국내 생태정치학자 1호로 꼽히는 문 씨는 대학 교직에 몸담지도 않았고 특별한 학파에 속하지도 않은 학자였다. 딱 부러지게 제자라 할 사람도 없었다. 여성과 환경을 화두로 운동과 연구에만 매진하느라 결혼도 못했기에 자식도 없었다.

17일 고 문순홍 소장의 1주기 추모식에서 김지하 시인이 “고인은 생태학의 중요성에 대해 나를 개안시켜준 인물”이라며 추모사를 하고 있다. 안철민기자

성균관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루드비히 막시밀리안대에서 공부한 그는 서구생태사상의 한국화를 위해 애쓰며 여성과 자연을 결합한 에코페미니즘을 이론적으로 발전시킨 생태여성론(eco-feminology)과 생태학과 국가이론을 결합한 ‘녹색국가론’을 제창했다. 또한 생태사회연구소, 불교환경교육원, 생명민회, 여성환경연대 등에서 활발한 사회참여활동을 펼쳤다.

그러면서 세속의 명예나 호사와는 담을 쌓고 지냈다. 이날 모인 사람들도 실로 세속의 이해관계와는 거리가 먼 인연들을 갖고 있었다. 몸이 불편해 지팡이에 의지한 시인 김지하 씨도 있었고, 희끗한 머리의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 고인이 이끌었던 여성환경운동가들의 모임 ‘꿈꾸는 지렁이들의 모임’의 젊은 회원들도 있었다.

그의 유고를 정리해 ‘생태학의 담론’, ‘정치생태학과 녹색국가’(아르케)를 펴낸 9인의 동학 중 한 사람인 구도완 환경사회연구소장은 “정말 죽어라 공부만 한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자신의 생명사상을 이론화한 문 소장에 대해 김지하 시인은 “나이는 어렸지만 문순홍 씨는 명백히 나의 생태학 선생이었다”며 제자를 자처했다.

문 씨의 대모였던 정상명 풀꽃평화연구소 대표는 “만일 하느님이 이 세상을 살면서 내게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네, 문순홍을 봤습니다’라고 답하겠다”고 말해 주변을 숙연하게 했다. 그렇게 고인은 ‘연꽃을 만나러 가는 사람’이 아니라 ‘연꽃을 만나고 가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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