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말로 만 35년 넘게 다닌 은행을 정년퇴직한 한국시티은행 한예석(韓禮錫·58) 전 부장은 퇴직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퇴직 후 더 바쁘다고 말한다.
제주도에 초콜릿박물관(www.chocolatemuseum.org)을 소유하고 있는 한 씨는 은퇴 이후박물관을 알차게 꾸미고 해외에 국산 초콜릿을 적극적으로 소개할 계획을 차차 진행해왔다. 당장 화이트 데이를 앞두고 초콜릿을 만들고 판매하느라 정신이 없단다.
이화여대 졸업 직전 한국씨티은행에 입사한 한 씨가 구체적으로 퇴직 준비를 시작한 것은 5년 전. 외환위기 때 은행을 떠나는 선후배들을 보면서 '나도 직장을 나갈 수 있겠다. 갑자기 나가게 돼 힘들어지면 어떻게 하나' 생각이 미쳤다. 그때부터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외국계 은행이라 외국출장이 잦았어요. 요리는 자신 없지만 초콜릿은 재미있을 것 같아 틈만 나면 초콜릿을 모으고 단기 과정에 등록해 만드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초콜릿 기술자격증도 서너 개 있어요."
한 씨는 2년 전 한미은행에 합병됐지만 시티은행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다고 회상했다. 외국계 은행이라 어쩔 수 없이 영어를 사용해야만 했고 1970년대 초 한 여자선배의 '투쟁' 덕분에 결혼 후에도 근무할 수 있었다.
"요즘 신입사원들도 '가늘고 길게' 직장생활을 하겠다고 한다지요. 빨리 승진하면 빨리 나간다고요. 저 자신도 '커리어 패스 컨트롤'이라고 제가 가는 길의 속도를 조절했습니다."
선견지명이 있다고 할까. 한 씨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승진도 빠른 지점장 권유도 받았지만 재미있게 오래 직장을 다니고 싶어 전산 업무를 택했다. 이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고 싶었고 계속 공부할 수 있는 여지도 많아 보였다.
물론 승진이나 월급에서 밀려 속상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어차피 갈 길이니까 여유 있게 가자고 마음을 다스렸다. 자리에 연연해하거나 무리하지 않았지만 여자라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야근이건 출장이건 가리지 않았다.
한 씨는 후배 맞벌이 주부들에게 "가정과 직장을 양립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조언했다.
김진경기자 kjk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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