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후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김동원(본명 김동혁·金東爀·사진) 씨는 당대 최고로 평가받은 배우이자 한국 근현대 연극을 지켜온 연극계 산증인이었다.
1916년 개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1932년 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연극부 창립작인 유진 오닐의 연극 ‘고래’에서 선장의 아내인 여자 역으로 처음 무대에 섰다.
그는 1934년 니혼(日本)대 예술과에 입학해 평생의 친구인 연극연출가 이해랑을 만났으며 귀국 후 함께 한국 연극의 발전을 이끌었다. 1947년 극단 극예술협회 창립 동인으로 참여했고 1950년부터 그 후신인 극단 신극협의회(신협)에서 활동했다.
‘우리 연극 100년’의 저자인 연극평론가 서연호 고려대 교수는 “고인은 근대극을 제대로 공부한 최초의 배우로서 이전까지의 신파조 연기에서 탈피한 사실주의 연기를 국내에 선보여 우리 연극사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1945년 출연작 ‘검찰관’부터 본명 대신 사용하기 시작한 예명 ‘김동원’의 ‘동’은 본명인 동혁에서, ‘원’은 그가 가장 좋아하던 소설가 춘원 이광수의 호에서 따왔다.
피란 시절 그의 연극을 보았다는 원로 연출가 임영웅 씨는 “전쟁 중이었지만 피란민들은 그의 수려한 외모와 개성 있는 연기를 보기 위해 공연장으로 구름처럼 몰려들곤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1950년 국립극장 개관작인 ‘원술랑’을 비롯해 ‘파우스트’ ‘뇌우’ 등 170여 편의 연극에 출연했다. 1950, 60년대에는 ‘자유부인’ ‘춘향전’ 등 170여 편의 영화와 TV드라마에도 출연했지만 1970년 중반 ‘연극 복귀’를 선언한 이후 영화와 TV 쪽에서 아무리 거액을 제시해도 교양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결코 출연하지 않았다. 마지막 연극 작품은 1994년 국립극단의 ‘이성계의 부동산’. 이 작품을 포함해 그의 상대역을 가장 많이 맡았던 원로 여배우 백성희 씨는 “고인은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단 한 차례 스캔들도 없었던, 인격적으로도 너무나 훌륭했던 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4년 뇌중풍(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1년 11개월 동안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투병해 왔으나 말년에는 거의 의식이 없었다. 14일 빈소에는 국립극단 원로배우 장민호, 백성희 씨, 연극연출가 이원경 임영웅 오태석 씨, 배우 박정자, 탤런트 최불암 씨 등의 발길이 이어졌다. 유족으로 부인 홍순지 씨와 아들 덕환(전 ㈜쌍용 사장), 진환(우리자산관리㈜ 전무이사), 세환(가수) 씨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는 원로극작가 차범석 씨가 장례위원장을 맡아 범예술인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17일 오전 9시이며 장지는 경기 용인시 용인공원묘원. 02-3410-6915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1916년 개성 생 △1932년 배재고보 시절 첫 연극 ‘고래’ 출연 △1934년 일본 니혼대 예술과 입학 △1947년 극단 ‘극예술협회’ 창립동인 △1950년 극단 ‘신협’ 창립동인 △연극 ‘원술랑’ ‘햄릿’ ‘파우스트’ ‘뇌우’ 등 170여 편 출연, 영화 ‘자유부인’ ‘아리랑’ ‘실락원의 별’ 등 170여 편, TV 드라마 ‘딸’ 등 580여 회 출연. △서울시 문화위원, 한국연극협회 부이사장, 국립극단장, 대한민국예술원 연극 영화 무용분과 회장 역임 △서울시 문화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대한민국 국민포장, 동랑연극상,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 이해랑 연극상 특별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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