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1년 골키퍼 야신 은퇴경기

  • 입력 2006년 5월 27일 03시 07분


“17년 후 이 아이는 스페인전의 승부차기를 막아냅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뒤 TV 광고에 등장했던 문구. 흑백사진 속 ‘이 아이’는 산체스 호아킨 선수의 슛을 막아내 한국팀을 4강으로 이끈 골키퍼 이운재.

11m 앞에서 가로 7.32m, 세로 2.44m의 골문을 향해 차는 페널티킥은 골키퍼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공의 방향을 예측하지 못하면 ‘0.5초의 대결’에서 이기기 어렵다.

이운재는 자전 에세이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승부차기는 극도의 정신적 긴장 속에 이뤄지기 때문에 진이 빠질 정도다. 4강 진출이 확정됐을 때 동료들에게 뛰어갈 힘조차 없었다.”

그렇게 피 말리는 페널티킥 전투에서 150번이나 승리한 골키퍼가 있다.

옛 소련의 레프 야신(1929∼1990). 야신은 190cm의 장신이었지만 동물적인 반사 신경을 자랑했다. 늘 검은 운동복을 입던 그의 대표적 별명은 ‘검은 표범’. 상대 공격수들은 그를 ‘흑거미’나 ‘흑문어’라고도 불렀다. 그의 철벽 수비가 거미손이나 문어발처럼 느껴졌기 때문.

기자들이 그 비법을 물을 때마다 그는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기 위해 (경기 전에) 담배 한 개비 피우고 보드카 한 잔 마십니다”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는 14년간(1954∼1967년) 소련 국가대표팀 골문을 지키며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우승 △1960년 ‘유로 60’ 우승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4강을 이끌었다.

그는 1963년 ‘올해의 유럽 선수’로 선정됐다. 이 상을 받은 골키퍼는 지금까지 그가 유일하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때부터 최고의 골키퍼에게 ‘야신상’이 수여됐고, ‘야신 클럽’에는 100경기 무실점을 달성한 골키퍼만 이름을 올린다.

야신은 1971년 5월 27일 그라운드를 떠났다. 이날 모스크바 레닌 경기장에서는 그의 소속팀(디나모 모스크바)과 유럽 올스타팀의 기념 경기가 열렸다. 펠레 에우제비우 베켄바우어 같은 세계적 스타들과 10만 관중이 그와의 작별을 아쉬워했다.

골키퍼는 가혹한 직업이다. ‘최후의 수비수 골키퍼에게는 단 한 번의 실수도 너무 많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골키퍼들은 늘 골을 먹는 악몽에 시달린다고 한다.

그들에게 야신의 말이 작은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골키퍼는 골을 먹는 게 괴로워야만 한다. 골을 먹고도 아무렇지 않은 골키퍼가 있다면 그에게는 어떤 미래도 없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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