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의 유해는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유족들은 장례절차를 논의 중이다.
1923년 전북 부안군 줄포면에서 출생한 고인은 1937년 14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9단의 문하생으로 입문한 뒤 1941년 한국인 최초로 일본기원 전문기사가 됐다.
일본에서 프로기사로 활동하다 1944년 귀국한 고인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서울 중구 남산동에 한국기원 전신인 '한성기원'을 설립해 현대 바둑의 효시가 됐다.
고인은 또한 국내 최초의 신문기전인 1956년 국수전에서 초대 우승자가 된 뒤 9연패를 이룩하는 등 1950~60년대 무적시대를 구가하며 한국 바둑의 초석을 만들었다.
'기도보국(棋道報國)'의 원대한 뜻을 품고 현대 바둑 개척에 나선 고인 초창기 숱한 난관에 부딪혀야 했다.
변변한 후원자를 찾지 못했던 한성기원은 1948년 조선기원으로, 이듬해 대한기원으로 개칭했으며 1954년 사단법인 한국기원, 1969년 재단법인 한국기원으로 4차례나 명칭이 변경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바둑판만 챙겨 피난길에 올랐던 고인은 1968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한국기원 회관이 건립되기까지 무려 16번이나 이사를 다녀야 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기원이 안정을 찾아가는 동안 고인은 국수전 9연패를 비롯해 최고위전 7연패, 초대 명인 등 통산 30회 우승을 기록하며 한국 바둑을 주도했다.
고인은 또 1955년 최초의 바둑교재인 '위기개론(圍碁槪論)'을 출간하는 등 다양한 바둑책을 출판해 한국식 바둑용어가 정착하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고인은 뿐만 아니라 김인, 윤기현, 하찬석, 조훈현, 조치훈 등 후배들의 일본 유학을 적극 추진해 국내 바둑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며 한국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인은 바둑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9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충순(80) 여사와 딸 영수(54), 영민(51) 씨, 아들 송연(49) 씨 등 1남 2녀가 있다.
성하운기자 haw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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