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조 명예국수를 회고하며 바둑계의 큰 별이 진 것을 아쉬워했다.
조 명예국수의 제자인 윤 9단은 “스승께선 바둑 실력에 앞서 기사의 기본자세를 철저히 가르치셨다”며 “입단 전 몸이 피곤해 고수가 바둑 두자는 것을 거절하자 ‘바둑을 배우는 단계인데 고수와의 바둑을 왜 꺼리느냐’며 따끔하게 혼내신 일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조 9단은 다섯 살 적 일화를 떠올렸다. 전남 목포에서 바둑 신동 소리를 들으며 서울로 올라왔던 조 9단은 조 명예국수가 운영하던 송원기원에서 아홉 점 지도기를 둔 적이 있다. 무려 3시간여의 대국 끝에 조 명예국수의 대승으로 끝나자 조 9단은 진 게 분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조 명예국수는 빙긋 웃더니 한판 더 둬 줬다는 것.
조 9단은 “조 명예국수가 일찍이 9단이 될 수 있는데도 미루시다가 1982년 내가 먼저 첫 9단이 돼 죄송스러웠다”며 “하지만 1989년 내가 잉씨배 우승을 한 뒤 한국바둑이 그만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조 명예국수의 공이 컸다는 점을 인정해 정부가 은관문화훈장을 드린 것으로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 명예국수는 1966년 국수 자리를 넘겨줄 때 김인 9단에게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자 “이렇게 언론이 바둑 뉴스에 열광적일 줄 알았다면 진즉 져 줄걸 그랬다”며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조 명예국수는 그 이후 더 열심히 대국에 임했다는 것이 기사들의 한결같은 회고다.
김 9단은 “조 명예국수는 40대 후반의 나이에도 20대 젊은 기사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승부를 펼쳤다”고 말했다.
김 9단은 스승인 고 김봉선 5단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 말고는 오직 조 명예국수에게만 ‘사범님’이란 호칭을 썼다. 나머지 기사들은 김 O단, 박 O단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조 명예국수에 대한 존경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한국기원의 ‘월간바둑’ 편집장을 지냈던 안영이 씨는 “요즘은 타이틀을 따면 우승상금이 몇 억 원씩 되지만 조 명예국수가 활약하던 당시에는 술 몇 번 먹으면 바닥날 정도로 상금이 적었다”며 “조 명예국수는 바둑계가 어려운 시절에 고생만 하고 모든 과실(果實)은 후배들에게 넘겨준 셈”이라고 말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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