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초기인 1915년 2월 영국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 경이 만든 기구다. ‘육상선박’이라니?
이 위원회가 개발할 물건은 처음엔 식수운반차량(water-carrier)으로, 나중에는 수조(水槽)를 뜻하는 탱크(tank)로 불렸다. 기구 명칭도 ‘탱크공급위원회(Tank Supply Committee)’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는 기밀 유지를 위한 속임수였다. 머지않아 ‘대지의 왕자’로 군림하게 될 탱크(전차)는 이렇게 영국 해군성의 주도로 탄생했다. 오늘날에는 물탱크와 구분하기 위해 전문 용어로 MBT(주력전차·Main Battle Tank)라고 부른다.
1차 대전은 최초의 참호전(trench war)이었다. 참호를 파고 겹겹이 철조망을 친 뒤 열을 지어 기관총을 설치한 채 대치하는 전쟁에선 불과 몇 m를 전진하기 위해 수천, 수만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어야 했다.
이런 교착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이 바로 탱크였다. 전쟁 초기 철판으로 동체를 만든 초보적인 무장차량이 만들어졌으나 참호를 건너뛰지는 못했다. 그래서 농업용 트랙터에 사용되던 무한궤도(caterpillar)를 달아 ‘땅 위의 전함’을 만들었다.
최초의 탱크는 기계공학자 윌리엄 트리턴의 이름을 따 ‘리틀 윌리(Little Willy)’로 불렸다. 그러나 무한궤도가 너무 좁았고 결함투성이였다. 그래서 무한궤도로 동체를 김밥처럼 휘감은 ‘머더(Mother)’가 탄생했고, 이 모델은 ‘마크-1’이라는 이름으로 양산됐다.
1916년 9월 15일, 영국군은 탱크 47대를 최초로 프랑스 동북부 솜 전투에 투입했다. 영국군이 전투 첫날(7월 1일)에만 전사자 2만 명을 낸 악명 높은 솜 전장의 교착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비장의 카드로 탱크를 투입한 것.
그러나 탱크의 첫 출전은 전혀 인상적이지 못했다. 화력이나 방탄은 요즘의 장갑차에도 못 미쳤고, 결정적 한계는 시속 6km의 느린 속도였다. 적진을 불과 1마일도 넘기 전에 대부분 고장이 나 주저앉거나 독일군의 야포 공격에 박살나 버렸다. 살아남은 건 고작 9대였다.
그럼에도 더글러스 헤이그 사령관은 탱크의 잠재성을 확신하고 수백 대의 탱크를 추가 주문했다. 탱크가 위력을 발휘한 것은 5개월 뒤인 캉브레 전투에서였다. 영국군은 300여 대의 탱크를 투입해 몇 시간 만에 적진 10km를 전진하며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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