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이제 편히 가십시오.”
박준영(47) 을지병원 이사장은 고인의 마지막 13년을 함께했던 ‘인생의 동지’였다.
1994년 1월 박 이사장은 지인에게서 “김 선생이 일본 후쿠오카(福岡)의 요양원에서 외롭게 투병 중”이란 얘기를 들었다. 그 길로 그는 의사와 간호사를 대동하고 일본으로 향했다.
“어린 시절 최고의 영웅이 다른 곳도 아닌 일본에서 비참하게 계신다는데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었어요.”
현지에 가보니 김 씨는 하지정맥류로 왼다리가 배 이상 부어 있었고 목 디스크를 앓는 데다 의식도 멍한 상태였다.
“‘제가 모실 테니 같이 가십시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처음에는 못 믿으시더라고요. ‘저는 한번 약속하면 지키는 사람이니까 가시죠’ 라고 설득했죠.”
아무 연고도 없고 누구도 돌보려 하지 않던 고인에 대한 박 이사장의 정성은 지극했다. 병실 하나를 살림방으로 내주었고 당뇨병 고혈압 하지부종 등 각종 병을 무료로 치료했다. 생활비도 보탰고 일본 여행 경비도 지원했다.
덕분에 김 씨는 빠른 속도로 건강을 회복했고 후배 양성 및 레슬링 재건사업에 활발히 참여하기도 했다.
박 이사장은 고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사나이의 의리란 게 무엇인지 보여 주셨죠. 일제 강점기에 선생님이 키우던 개를 일본 군인이 빼앗으려 하자 차라리 빼앗기느니 주는 게 낫겠다 싶어 기증을 했는데 그 죄책감을 평생 잊지 못하고는 고향에 ‘개 동상’을 세워 주기도 했어요.”
박 이사장은 고인은 어린아이처럼 마냥 순진하고 천진했다고 회고한다.
“그분이 워낙 유명하니까 돈이 많은 줄 알고 사기를 치려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제가 그런 사람들을 왜 고발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 사람은 오죽하면 나한테 사기를 치겠느냐’며 허허 웃으셨어요.”
박 이사장은 김 씨가 돌아가시던 26일 밤 씁쓸한 마음에 잠을 한숨도 못 잤다고 했다.
“한 달 전쯤 선생님이 예전에 경기에서 박치기하는 모습의 사진 두 장을 크게 확대해 주시더라고요.”
이제 그 사진은 박 이사장의 가보가 됐다.
“국가적으로 국민의 자존심을 살려 준 분들이 말년에 비참한 생활을 하지 않도록 ‘원로 체육인 마을’ 같은 제도적인 장치를 만들면 좋겠어요. 비록 제가 모셨지만 천하의 김일 선수가 병원에서 임종을 맞았다는 것이 지금도 가슴이 아파요.”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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