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닫힌 마음열어 서비스정신 배워할 때"

  • 입력 2006년 10월 30일 17시 00분


"철학을 철학의 울타리에만 가둬온 철학자의 닫힌 마음을 열어야할 때입니다. 철학자들은 이제 '학문의 제왕'이라는 고고한 자리를 박차고 나와 다른 분과학문의 연구를 받쳐주는 서비스정신을 펼쳐야합니다."

최근 '후설의 현상학과 현대철학'을 펴낸 이남인(48) 서울대 교수는 철학이 인접학문과 학제적 연구에 적극 나서야한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지난 95년 한국학자로선 처음으로 그의 저서가 현상학분야에서 세계최고권위를 인정받는 현상학총서(phaenomenologica) 시리즈로 발간된 바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현상학을 철학의 한 분과로만 생각합니다. 현상학은 자연과학적 '양적 연구'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질적 연구'의 방법론으로서 모든 학문에 적용돼야 합니다."

사실 20세기 초 현상학의 등장배경과 현재의 상황은 유사한 측면이 많다. 현상학은 물리학의 실증주의와 역사학의 역사주의, 심리학의 심리주의 등 개별학문의 방법론이 다른 학문분야까지 넘보는 데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현했다. 현상학이 개별 사태 영역(노에마)은 그에 해당하는 별도의 사유방식(노에시스)이 존재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21세기는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라는 경제학적 합리론과 '모든 생명활동은 유전자의 자기복제 추구의 결과'라는 분자생물학의 논리가 다른 개별학문의 논리까지 지배하는 시대다. '인문학의 위기'도 결국 특정학문의 논리가 다른 학문논리를 지배하면서 발생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현상학을 제창한 후설의 철학이 21세기에도 유효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많은 현대철학자들은 후설을 서구철학의 이성중심주의를 계승한 철학자라고 비판하지만 후설이야말로 진정한 다원주의자입니다. 그의 초기 현상학에선 이성이 강조되지만 후기의 반성적 현상학으로 넘어가면 본능과 감정, 운동감각이 강조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봐야합니다."

이 교수는 독일유학시절 후설이 남긴 방대한 미발간 유고를 읽으면서 이를 절감했다고 한다. 그에게 지난해 제50회 학술원상을 안겨준 '현상학과 해석학'은 후설의 '초월적 현상학'과 그 제자였던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현상학'을 비교분석한 책이다. 이 책은 하이데거의 현상학이 후설의 현상학을 심화 발전시켰다는 기존 학계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1920년대 이후 후설의 후기저작들에 이미 하이데거적 요소가 상당부분 포함돼있음을 보여줬다. 그 후속작인 '후설의 현상학과 현대철학'은 후설의 현상학이 아도르노와 하버마스의 비판철학, 레비나스의 윤리학, 가다머의 해석학의 핵심내용도 상당부분 선취했음을 입증했다.

"후설을 비판한 학자들은 대부분 그의 초기저작만 보고 후기저작은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미국의 현상학자 제임스 하트의 말처럼 '후설은 철학사의 거봉이 아니라 하나의 거봉 너머에 또 다른 거봉이 잇따라 나타나는 산맥'이니까요."

재밌는 점은 현상학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으로서 철학에 대한 후설과 이 교수의 화법의 차이다. 후설은 철학을 '모든 것의 원리, 뿌리에 관한 학문'이라고 고고하게 천명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철학은 다른 학문을 밑에서 받쳐주는 학문'이라고 표현한다. 그의 이런 겸손한 인식은 벌써 몇 년 째 '질적분석 집담회'와 '경제학철학 집담회' 등 철학과 다른 학문 간 학제연구를 통해 현상학을 실천학문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진지한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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