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훈=(아주 반가운 얼굴로 두 손으로 악수를 한 뒤) 뵙고 싶었습니다.
최재천=(부드러운 미소와 눈웃음을 지으며) 제 책을 읽고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좋은 글을 써 주신 교수님께 제가 감사합니다. 사실 교수님 책을 주위 분들에게도 권하고 다닙니다. 영화배우 장동건 씨도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를 참 의미 있게 읽었다고 하더군요.
저도 예전의 마초 기질을 막연히 반성하고 있었는데 ‘여성의 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를 읽은 뒤 남녀에 대해 구체적인 균형감을 가질 수 있게 됐습니다. 평소에 ‘알면 사랑한다’고 하셨는데 그럼 모르면 덜 사랑하거나 미워하게 되나요?
최=모든 명제에 역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생명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르는 것에 대해 무작정 사랑하기는 힘든 겁니다. 알려고 노력하고 이해하려 하다 보면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죠.
박=그럼 실제 생활로 돌아와서, 남에게 근래에 화내 본 기억이 있으신가요?
최=(잠시 생각한 뒤) 별로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화가 나도 표현을 하면 그 사람을 다시는 못 볼 것 같아 화를 못 내겠어요. (얼굴이 다소 굳어지며) 사실… 몇 해 전 제가 아끼던 제자가 본인의 이해관계 때문에 저를 공개적으로 부당하게 공격하고 다닌 적이 있었어요. 처음엔 많이 분노했지만 결국 속으로 삭이고 이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전 그 녀석과 오랜 시간을 함께했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저와 함께 만날 사람이거든요. 주위에선 뭐 그런 사람을 이해하느냐며 저를 이해 못 하겠다는 사람까지도 있었어요.
박=저는 이해합니다. 교수님과 그런 면이 비슷한 사람을 잘 알거든요. 안성기 씨라고….
최=(다시 환하게 웃으며) 아, 그렇군요. 저는 그분의 큰 팬입니다. 아직 뵌 적은 없지만 참 존경스러운 분이죠.
박=그럼… 인생에서 화내신 적이 한번도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최=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제 아이가 학교에서 부당한 차별을 받아 입학을 거부당한 적이 있었어요. 학교의 명백한 잘못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 아이의 정서가 불안하다는 거짓 이유를 들어 아이가 크게 상처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정말 집요하게 글과 말을 총동원하여 거세게 항의하여 학교 측의 공개 사과를 받아 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괜찮지만 제가 아끼는 사람을 아프게 할 때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화낸 적이 한번도 없다고 했으면 최 교수님을 이상하게 생각할 뻔했습니다.)
최=세상이 숲이라 가정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각각의 분야는 나무인 것입니다.
(아무리 나무의 생김을 잘 알아도 숲이란 전체를 보지 못하면 세상을 볼 수 없듯이, 과학도, 인문학도, 그 어떤 분야도 함께 만나 어울리지 못하면 진리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이 통섭의 개념입니다. 진리는 하나이고, 결국 만난다는 것입니다.)
박=그렇다면 과학자인 교수님의 저서들이 저같이 예술하는 사람에게 영감을 준 것도 통섭의 초기 단계라고 믿어도 되겠습니까?
최=(웃음) 그렇게 생각해 줘 기쁩니다.
박=좀 느닷없는 질문이지만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최=인간은 동물과 달리 언어와 사고가 결탁돼 있는 ‘설명의 뇌’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물들은 세대마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죽지만, 인간은 기록을 통하여 진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실수를 안 하고 살 수 있는 것이 인간이죠.
박=오늘 반가웠고 감사했습니다.
최=(환하게 웃으며) 아 참, 영화인 앞이라서가 아니고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은데요, 전 영화광입니다. 대학 때는 프랑스, 독일문화원에서 상영되는 영화 보기가 취미일 정도였죠. 요즘은 사극에 관심이 많이 가는데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왕의 남자’를 보곤 그 만듦새에 참 감탄했습니다.
박=(더 환하게 웃으며) 그럼 지금 극장에서 상영하는 제 영화 ‘라디오 스타’도 좀 봐 주십시오. 감독이 ‘왕의 남자’를 만든 이준익 감독님이거든요. 영화가 아주 재밌고 찡합니다. 영화를 좋아하신다니 정말 기쁩니다. 오늘 거듭 감사합니다.
최재천 교수님이 통섭을 강조하는 것은, 어쩌면 수십 년간 한 길을 성실히 파 온 장인만이 가질 수 있는 갈증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만남 내내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을 열심히 가는 것이 진리에 다다르는 첫 단추일지도 모르는 것이지요. 배우 생활 더욱더 열심히 하기로 굳세게 마음먹었습니다.
박중훈 영화배우
■ 인터뷰 상대 바뀐 거 아닌가요?
“저를요? 스타는 박중훈 씨인데 혹시 그 반대 아닙니까?”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영화배우 박중훈 씨가 팬으로서 인터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기자의 섭외 전화를 받고는 놀라더니 “나도 박중훈 씨 팬”이라며 흔쾌히 만남을 승낙했다. 전화로 약속을 정할 때도 두 사람은 서로 깍듯이 예의를 갖췄다. 박 씨가 먼저 “장소는 무조건 교수님 편하신 곳으로…” 하고 양보하자 최 교수는 “대스타를 내 쪽으로 오시라고 해도 되는 건지…. 어디 ‘중립지대’ 정도에서 만나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요”라며 상대를 배려했다. “경험상 인터뷰이(interviewee)의 마음이 편한 곳에서 해야 인터뷰 기사 내용도 좋더라”는 박 씨의 말에 따라 결국 인터뷰 장소는 최 교수의 ‘홈그라운드’인 이화여대 연구실로 결정됐다. 박 씨는 인터뷰 시간인 오전 10시에 정확히 모습을 드러냈다. 서로의 호칭은 ‘최 교수님’, ‘박 선생님’.
최 교수의 저서를 거의 모두 읽었다는 박 씨가 최 교수 이론의 핵심인 ‘통섭’을 화두로 삼아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자 최 교수는 “여느 전문가와의 토론 못지않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 교수는 박 씨가 평소 화려한 비유법을 즐겨 사용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듯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비유의 황제’인 박 선생님 앞에서 ‘감히’ 비유를 좀 들어 본다면…” 하는 전제를 단 뒤 풍부한 비유법으로 자신의 이론을 설명했다. 이번엔 박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시간 예정이었던 인터뷰는 40분 이상 길어졌지만 두 사람은 “오늘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에 따로 만나서 하자”고 약속했고 박 씨는 자신의 휴대전화 연락처와 e메일 주소를 적어 건넸다. 최 교수는 박 씨에게 자신이 번역한 책 ‘통섭’을 선물했다.
인터뷰가 영화 ‘라디오 스타’ 때문에 한창 바쁜 시기에 이루어졌음에도 박 씨는 원고 마감일에 정확히 인터뷰 기사를 보내 왔다. 원고를 보낸 후에도 박 씨는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주는 단어와 토씨 하나하나는 물론 오탈자까지 꼼꼼히 확인하며 일곱 차례나 수정 원고를 다시 보내왔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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