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은 지난해 11월 타계한 형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동생인 백아 김창현(白牙 金彰顯) 씨와 함께 한국 서예계를 이끌어 왔다.
어려서 붓을 잡은 고인은 1944년 이유 없이 일본경찰에 연행됐다 풀려나온 뒤 집에서 옛 사람의 필적을 모은 법첩(法帖)으로 독학해 서예가의 길로 나섰다. 휘문고와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한 그는 1956년 체계적인 서예 연구와 보급을 위해 동방연서회를 설립해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여초는 일찍이 국제무대로 눈을 돌려 1970년대 대만의 타이베이(臺北)와 일본 도쿄(東京)에서 초대전을 열었다. 1980년대 말 중국에 진출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베이징(北京) 톈안먼(天安門)광장 혁명기념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한국 서예계의 전통을 지키며 새로운 것을 이뤄내는 데 전 생애를 바쳤으며 전예해행초(篆隸楷行草) 등 모든 서체에 능했다. 여초의 글씨는 원숙미와 독창성이 엿보이며 웅혼하고 활달하다는 평을 받았다. “추사 이후 여초”라는 찬사가 나올 정도였다.
여초는 또 금석문 중 각 서체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만 선별해 서예교본 ‘동방서범’(전 10권)을 펴냈다. 국전 서예부를 향해 “원로라도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심사위원으로 추대할 수 없다”고 일갈하는 등 꼿꼿한 성품으로도 유명하다. 1999년 교통사고로 오른손을 다친 뒤 왼손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해 왼손글씨 전시회도 열었다.
유족으로는 형년(동방연서회 상임이사) 씨 등 2남 3녀가 있다. 발인 3일 오전 9시,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지는 경기 용인시 선산. 02-2072-2016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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