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8월 28일 미국 워싱턴의 링컨기념관 앞.
노예 해방 100주년을 맞아 모인 25만 명의 평화주의자는 흑인 민권 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명연설을 듣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소망한 평화와 비폭력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꿈을 깬 것은 백인 제임스 얼 레이였다.
주유소와 상점 등을 털며 몇 차례 감옥을 들락거린 좀도둑 레이는 1967년 미주리 주립교도소를 탈옥한 뒤 이듬해 4월 4일 비극을 연출했다. 파업 중인 청소부들에게 동조하기 위해 테네시 주 멤피스를 찾았다가 한 모텔 발코니에 서 있던 ‘역사의 거목(巨木)’을 향해 총탄을 날린 것이다.
그는 놀랍게도 현장에서 붙잡히지 않았다. 목격자가 없었던 건지, 어떤 비호세력의 힘으로 그가 방치됐는지는 알 수 없다.
레이는 유유히 탈출해 해외 도피를 시작했다. 캐나다에서 만든 가짜 여권을 갖고 유럽을 돌아다녔다.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경찰에 체포된 것은 사건 발생 두 달이 지난 뒤였다.
1969년 3월 10일, 테네시 주 멤피스 연방법원에서 재판이 열렸다. 레이는 자신의 범행을 자백하고 99년형을 선고받았다. 사흘 뒤 “강압에 의한 자백이었고 모든 것은 음모”라고 번복하긴 했지만….
레이는 70세 되던 1998년 복역 중 간경화로 사망했으나 그 뒤로도 의혹은 끊이질 않았다.
탈옥해 쫓기던 그가 킹 목사의 등장으로 삼엄한 경비를 펴던 멤피스에 어떻게 잠입할 수 있었는지, 왜 지문이 묻은 총을 현장에 남기고 도망갔는지, 어떻게 미국연방수사국(FBI)의 추적 속에서도 두 달 동안 유럽 각국을 헤집고 다녔는지….
레이는 복역 중 수시로 “나는 킹을 쏘지 않았다(I did not shoot King)”고 주장했다 한다.
킹 목사의 유족들은 ‘음모론’을 제기하며 진실을 파헤치려고 매달렸다.
레이 사망 1년 뒤인 1999년 유족들의 요청으로 열린 테네시 주 셸비 카운티 법정에서 흑인 6명, 백인 6명으로 구성된 배심원은 “레이 혼자 저질렀다고 보기엔 너무 복잡한 사건”이라며 “킹 목사의 암살에 미국중앙정보국(CIA)과 군부 등이 조직적으로 연루됐다”고 평결했다. 하지만 평결 뒤 실제로 기소된 사람은 없었다.
김상수 기자 s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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