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루이 너새니얼 드 로스차일드 남작은 성격이 밝고 낙천적이었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에 최후통첩을 보낸 날에도 루이는 알프스의 별장에서 스키를 타고 있었다.
유대인 명가인 로스차일드 가문은 히틀러가 호시탐탐 노리는 대상이었다. 가족들은 망명을 권했지만 루이는 집안의 재산을 지켜야 한다며 빈에 남아 있기를 고집했다.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오던 1938년 3월 나치 완장을 두른 독일 병사 2명이 로스차일드가의 저택 앞에 나타났다. “남작님은 지금 당구를 치고 계십니다.” 집사의 말에 병사들은 돌아갔다. 다음 날인 13일, 이번엔 여섯 명의 나치 대원이 왔다. 루이는 숨지 않았다.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그는 좀 기다려 달라고 했다.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나서야 루이는 일어났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신화는 18세기 유대인 대금업자였던 메이어 암셀이 로스차일드 은행을 창설하면서 시작된다. 암셀은 파리, 런던, 나폴리, 빈 등에 지점을 만들고 다섯 아들에게 지점장직을 맡겼다.
유럽이 혁명과 전쟁의 격변을 겪던 시기에 이들은 각 나라의 주요 정보를 공유하며 유럽 전역을 망라한 선진 금융기법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유럽의 중심 국가였던 오스트리아 제국이 이 가문의 자식들에게 남작 작위를 줄 정도로 정부와의 밀착 정도가 깊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엄청난 재산에 눈독을 들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체포된 루이를 만난 경찰서장은 “도대체 당신이 얼마나 부자이기에 이렇게들 난리입니까?”라고 물었다. 루이는 “회계사들이 모두 달려들어 세계 각국에서 팔리는 금융상품과 증권시장에 대해서 조사하면 며칠 뒤엔 대략 알 수 있겠지요”라고 답했다. 바보 취급을 당했다고 생각한 서장은 루이를 지하 유치장에 가둬 버렸다.
나치 지도부는 남작의 석방을 조건으로 재산을 요구했지만 로스차일드 가문의 혜안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은 이 일이 있기 2년 전에 주요 재산의 대부분을 영국으로 빼돌렸다. 나치는 원하는 만큼을 받지 못했고, 남작은 곧 풀려났다.
그러나 나치로부터도 지켰던 재산은 2차 대전 이후 세계 금융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지면서 큰 타격을 받는다.
‘로스차일드는 끝났다’는 얘기까지 나왔지만, 이 뿌리 깊은 금융 가문은 1960년대 원폭 제조의 원료인 캐나다, 호주, 아프리카의 우라늄광을 손에 넣으며 재기에 성공했다. 영국의 투자은행 NM로스차일드, 스위스의 로스차일드뱅크AG 등의 입지가 탄탄하며, 록펠러 가문과 손잡고 미국 체이스맨해튼 은행의 설립에 참여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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