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년 11월이었다. 패커는 금광을 찾아 콜로라도에 온 사람들의 가이드를 맡았다. 그들을 기다린 것은 매서운 혹한. 그러나 패커와 5명의 여행객은 만류를 뿌리치고 무작정 산속으로 향했다.
그리고 두 달…. 패커는 홀로 귀향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가 멀쩡히 걸어 나오자 사람들은 의문을 품었다.
패커의 설명은 이랬다.
“지독한 눈발 때문에 일행이 뿔뿔이 흩어졌고 나도 풀을 뜯어먹으며 연명했다.”
하지만 그는 풀을 먹으며 연명한 것치고는 너무 건강한 모습이었다. 또 그의 주머니에선 실종 ‘대원’들의 현금과 소지품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궁지에 몰린 패커는 무시무시한 고백을 한다.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일행들이 차례로 죽었다. 그때마다 살아남은 자들은 배고픔을 못 참고 동료의 시체를 먹으며 앞으로 나갔다. 그렇게 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그런데 이 말도 거짓이었다. 현장조사를 나간 경찰은 죽은 5명의 유해를 한곳에서 무더기로 발견했다. 결국 그는 살인 혐의로 구속됐지만 곧 감옥을 탈출했다.
패커는 9년간의 도피 생활 끝에 술집에서 그의 웃음소리를 알아들은 보안관에게 다시 덜미를 잡혔다.
그의 두 번째 고백. “주위를 둘러보고 오니 일행 중 한 명이 나머지 4명을 죽이고 그들의 시신을 끓이고 있었다. 나까지 죽이려 달려드는 그에게 총을 발사했다. 나는 고민 끝에 다섯 명의 시신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법원은 1883년 4월 13일 패커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다. 그는 미국에서 식인(食人)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당시 재판관은 “우리 마을엔 민주당원이 7명밖에 없었는데, 네놈이 그중 다섯을 먹어버렸다”며 버럭 화를 냈다고 하는데 이는 ‘믿거나 말거나’다.
패커는 후에 감형을 받았고 1901년에 석방됐다. 말년에는 경비원으로 일하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전해진다.
사족(蛇足) 몇 가지. 노년에 그는 채식주의자로 변했다고 한다. 지금도 콜로라도대에는 그의 이름을 딴 고깃집이 있다. 이를 소재로 한 영화도 나왔고 콜로라도에 있는 그의 무덤은 관광지가 됐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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