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예수회 수사의 길을 걸었던 그는 사형제 폐지론자였다. 다만 그는 사형 폐지가 안 될 것을 전제로 “모두에게 공평하고 고통이 덜한 처형 방법이 필요하다”며 이 기계의 사용을 제안한 것뿐이었다.
조제프 기요탱(1738∼1814). 외과 의사였던 그는 프랑스혁명 직후 국민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모든 사형수를 기계로 처형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 기계는 그의 이름을 딴 여성명사 기요틴으로 불리게 됐다.
기요틴과 비슷한 장치는 오래전부터 이미 여러 곳에서 사용됐다. 14세기 아일랜드에는 ‘메이든’이라는 비슷한 기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15세기 이탈리아와 스위스에서도 유사한 도구가 사용됐다고 알려졌다. 기요탱 자신도 옛 문헌에서 그런 장치가 묘사된 그림을 발견했다.
기요틴이 도입되기 전까지 프랑스에서 사형집행 방법은 두 가지였다. 귀족이라면 목을 자르는 참수형, 평민은 목을 매는 교수형이었다. 참수형은 고통이 덜해 귀족에게 주어진 특권이었다.
칼이나 도끼를 사용하는 참수형도 한 차례에 끝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돈 많은 귀족의 사형수 가족들은 미리 집행관에게 칼이나 도끼를 날카롭게 벼려 단번에 끝내도록 뇌물을 줘야 했다.
그러나 기요틴은 달랐다. 그것은 모든 사형수에게 공평한, 프랑스혁명 이념에 부합하는 ‘평등 기계’였다.
1792년 4월 25일, 말 탄 노상강도(highwayman)로 악명을 떨친 니콜라 펠티에르가 기요틴의 첫 실험 대상이 됐다. 두 개의 기둥 사이에 파진 홈을 따라 순식간에 떨어지는 무거운 칼날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을 끝냈다.
실제 기요틴을 제작한 인물은 외과학회 회원 앙투안 루이(1723∼1792)였다. 처음에는 그의 이름을 따 ‘루이종’ 또는 ‘루이제트’라 불렸지만 신문들은 발음의 울림이 좋다는 이유로 ‘기요틴’을 즐겨 썼고 그렇게 굳어졌다.
그러나 이 ‘자비로운 기계’는 불과 1년여의 공포정치 기간에만 수만 명의 목을 자르며 사실상 대량 살인기계가 됐다. 물론 기요틴이 없었다면 상황은 훨씬 끔찍했을지도 모르지만 이 같은 역사의 궤적은 사람들이 기요탱의 이름을 악명 높은 처형기구와 연관시켜서만 기억하게 만들었다.
오죽하면 기요탱 자신도 기요틴에 목이 잘려 죽었다는 얘기까지 나왔을까. 기요탱은 실제로는 76세의 나이로 자연사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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