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은 이승만 정부부터 전두환 정부 출범 때까지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중요한 현장에 많이 있었다. 특히 그가 경제부총리와 총리로 일한 기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 12·12쿠데타, 5·18민주화운동 등 한국 현대사를 뒤흔든 ‘메가톤급 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다.
경험한 분야도 다양하다. 총리를 비롯해서 차관급 이상 관직을 6번이나 맡은 관료인 동시에 두 차례 지역구 의원으로 선출된 정치인, 삼성물산 회장과 쌍용양회 사장 등을 지낸 경영인이기도 했다. 경북 칠곡 출신으로 현대사의 영욕을 두루 경험한 고인은 다양한 경력과 폭넓은 인맥으로 ‘TK(대구·경북)의 대부’로 불리기도 했다.
고인은 일제강점기에 경제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대구고보(현 경북고)를 졸업하고 경성제대(현 서울대) 법문학부 재학 중이던 1943년 지금의 행정고시에 해당하는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했다. 광복 후 대학교수 등을 지낸 그는 1951년 상공부 과장으로 다시 관계(官界)와 인연을 맺었다. 이어 상공부 전기국장 광무국장 공업국장 등을 거쳐 39세 때인 1959년 경제기획원의 전신인 부흥부 장관에 임명됐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 동해전력 쌍용양회 쌍용산업 사장과 대한상의 부회장 등을 거친 고인은 1973년 정계에 입문했다.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공천으로 군위-성주-칠곡-선산에서 당선됐고 1979년 10대 총선에서 재선됐다.
국회의원 신분으로 1975년 보건사회부 장관을 거친 그는 1978년 박정희 정부의 마지막 경제부총리로 임명됐다. 경제부총리 취임 후에는 ‘고속성장 드라이브’의 부작용 해소에 초점을 맞춰 안정화 정책을 폈다.
이런 그의 시각을 잘 보여 주는 것이 1979년에 나온 ‘4·17 경제안정화 종합대책’이었다. 가격통제 철폐, 수입 개방 확대, 중화학공업 축소 및 조정, 새마을운동 지원 축소 등을 담은 이 선언은 성장 우선정책에 제동을 거는 내용이었다.
그해 10월 26일 박 대통령 시해라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하면서 다시 한 번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그는 박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국무위원들에게 비상계엄 선포를 요구했을 때 “이유를 대라”면서 대통령의 시신까지 확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1995년 검찰의 12·12쿠데타 수사 과정에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겸직을 반대하는 등 신군부와 마찰을 빚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당시 그의 역할에 대해서는 지금도 평가가 엇갈린다.
1999년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 말년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던 고인은 지난해 2월부터 척추골절로 입원 치료를 받아 오다 최근 병세가 악화됐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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