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빅토리아가 여왕이 된 것도 힘겨운 투쟁을 통해서였다. 조지 4세의 직계 혈통이 끊어지면서 왕의 동생의 딸인 빅토리아가 왕위 계승권자가 됐다. 일찍이 남편을 여읜 빅토리아의 어머니는 연인과 짜고 빅토리아가 친가와 어울리지 못하게 온갖 수를 썼다. 장차 정치를 좌지우지할 속셈이었다. 영리한 빅토리아는 즉위하자마자 어머니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쫓아 보냈다. 빅토리아 여왕은 즉위 초기 매일 1시간 이상 총리를 만나 집무를 익히는 열성을 보였고, 국민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여왕이 되기 위해 항상 고민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가 영국의 황금기로 불렸던 것은 18세기 후반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산업혁명에 힘입은 바가 크다.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본주의가 발달했으며 의회 정치가 정점을 이루어 힘 있는 국가가 된 것. 여기에 인도를 비롯해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아프리카 대륙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구축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다.
입헌군주로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랐기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이 실제 정치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던 편이다. 그러나 여왕의 재위 64년은 ‘팍스 브리태니카’ 그 자체였다. 1850년에는 전 세계 공업생산의 28%를 영국이 차지했고 철강 생산의 70%, 면직물 생산의 50%가 영국산 제품이었다고 한다. 또 세계 상선의 33%가 영국 소유였으며, 금융 자본의 90%가 파운드화로 결제됐다.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할 즈음 대영제국은 넓이로는 1100만 제곱마일(지표 면적의 20%), 인구는 4억 명(당시 전 세계 인구의 25%)에 이르렀다.
여왕의 자식 농사도 남달랐다. 빅토리아 여왕은 외사촌인 독일 출신 앨버트 공작과 결혼해 4남 5녀를 두었다. 이들이 프로이센, 러시아 등 7개국 황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의 할머니’로도 불렸다. 여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37명의 증손자가 유럽 전역에 퍼져 살았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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