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뭐 하며 시간을 보내느냐고 물었더니, 단박에 뇌과학과 컴퓨터 알고리듬의 관계에 푹 빠져 있다는 답이 돌아온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참 설명하는 모습이, 방금 전까지 수줍게 자신을 소개하던 여학생이라고 믿기 어렵다. 남예슬(16·민족사관고 1학년) 양이다.
남 양은 2003∼2005년 한국정보올림피아드와 전국 초중학생 IT꿈나무 올림피아드에서 은상 동상 장려상을 번갈아 탔다. 대상을 받은 적은 없지만, 전국의 내로라하는 컴퓨터 영재들이 참가한 대회에서 매년 상을 받은 것은 화려한 경력이다.
무엇보다 남 양이 눈에 띄는 것은, 아직 어린 여학생이지만 컴퓨터 재능을 살려 최첨단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한국의 빌 게이츠가 되고 싶다는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고 있다는 점. 이제 갓 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 중 컴퓨터 프로그래밍 분야에 관심을 갖고 매달리는 학생이 많지 않다. 여학생은 더욱 드물다.
○문제 푸는 자체가 즐거워
남 양의 화려한 수상 경력은 혹시 자녀 교육에 열성인 부모에게 떠밀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참가해 온 결과는 아닐까. 남 양을 만나자마자 ‘의혹’은 바로 풀렸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자체가 정말 짜릿해요. 머릿속으로 문제를 푸는 것보단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어 실제 결과를 내는 게 재미있었죠.” 남 양의 표현을 따르면 “문제 푸는 게 즐거워 문제에 파묻혀 지냈다”. 영재들이 모인 민사고에 입학한 요즘도 프로그램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몇날 며칠을 빠져 있을 때가 예사다.
“다른 일을 하다가도 프로그램과 알고리듬 완성에 해법이 떠오를 때가 많아요. 머리에 스치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참지 못하고 노트북을 열죠.”
컴퓨터 영재반이던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또래 아이들은 기껏해야 게임에 몰두하거나 e메일을 주고받는 게 고작이었을 때 남 양은 자신이 즐길 게임을 프로그래밍했다. ‘마이펫 닷컴.’ 원하는 동물을 골라 먹이도 주고 함께 놀아 주는 게임이다. 프로그램의 속도를 빨리 하거나 메모리를 줄여 효율을 높이기 위해 며칠을 매달리기 일쑤였다.
남 양의 부산 온천중 1학년 담임이었던 안창호 교사는 어느 날 남 양의 공책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전한다.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컴퓨터의 활성화 방법이 논문처럼 빼곡히 정리돼 있었던 것. “친구들 사이에서 불린 예슬이의 별명이 ‘영재’였죠.”
○평범한 교육이 발견하고 키운 재능
컴퓨터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재능을 보이진 않는다. 수학 과학적 소질은 물론 영어실력도 중요하다. 프로그래밍 언어는 영어로 이뤄져 있다. 실제로 남 양에게 서울대 문용린 교수팀이 개발한 MI적성진로진단검사를 받게 해 봤더니 논리수학과 언어적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남 양의 재능은 하늘이 내려 주신 선물일까.
아니다. 남 양의 이런 재능을 발견하고 키운 과정은 평범해서 되레 독특하다. 어머니 장무경(43) 씨는 네 살이 넘어서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 딸이 자폐아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언니 오빠들과 어울리면 말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유치원을 찾았다. 어머니의 걱정은 남 양이 언어적 재능을 일찍 깨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남 양이 말을 배우면서 가르치지도 않은 글을 읽기 시작했다. 유치원이 난리가 났다.
글을 깨친 후 남달리 독서를 좋아하는 남 양을 위해 어머니는 온 가족의 시립도서관 대출카드를 만들었다. 주말이면 가족이 도서관에서 살았다. 이때 남 양은 과학책은 물론이고 다양한 분야의 책 수백 권을 봤다. 돈이 거의 들지 않은 장 씨의 평범한 선택은 남 양의 상상력과 재능을 자극하는 바탕이 됐다. 통역 일을 하는 아버지는 퇴근 후와 주말에 자연스레 남 양과 영어로 대화하며 놀아 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미 과학책 독후감을 영어로 쓰고 영어 일기를 매일 쓴 것은 특별한 영재교육이나 영어과외 덕분이 아니었다.
남 양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오빠를 따라 본 워드프로세서 1급 시험을 첫 응시에서 합격했다. 컴퓨터 재능은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생겨난 듯했다. 하지만 사실 어릴 때부터 차곡차곡 쌓아 온, 많은 부모가 으레 사교육에 의존하면서 잊어버리는 가정교육에서 나온 것이었다.
재능을 알아본 담임교사가 남 양을 대학 컴퓨터 영재반에 보내자고 말했다. 남 양은 시험을 봐 부산시교육청의 정보영재로도 뽑혔다. 어린 시절의 가정교육이 수학 과학 영어 재능의 바탕을 자연스레 키웠다면 이때부터 남 양은 자신의 컴퓨터 재능을 집중 단련했다.
○뚜렷한 목표의식과 친화력까지 갖춰
남달리 분명한 목표의식은 이미 초등학교 때 뚜렷해졌다. 그때 이미 제2의 빌 게이츠를 꿈꿨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하버드대를 목표로 삼은 것도 빌 게이츠가 다닌 대학에서 자신의 재능을 키우기 위한 것. 이때부터 하버드 교정 사진을 책상 앞에 붙여 놓았다.
한국과학영재학교에 1차 합격하고도 민사고 시험을 치른 것은 민사고 국제반에서 공부하는 게 하버드대 유학에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 양은 하버드대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뇌과학과 인공지능 분야로 자신의 전문 분야를 좁혀 갈 생각이다. 남 양이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처럼 대학을 중퇴하고 회사를 차릴지 어떨지는 자신도 아직 모른다.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미국이 자랑하는 회사가 된 것처럼 저도 한국이 자랑할 만한 세계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할 거예요. 이 프로그램과, 또 이를 통해 번 돈은 저만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쓰고 싶어요.”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재능으로 사회적 부를 창출해 세상에 공헌하겠다는 16세 소녀. 그 꿈은 무한대로 펼쳐져 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정보올림피아드가 캐낸 ‘IT 진주’
남예슬(16) 양은 정보올림피아드에 매년 참가해 상을 받으면서 재능을 확인하고 발전시킨 전형적인 사례다. 문제 풀기를 즐기는 남 양에게는 어린 학생들에게 부담으로 생각될 올림피아드 참가가 즐거운 놀이와도 같았다. 민족사관고 과학과 김창환 교사는 “올림피아드는 짧은 시간 안에 가장 효율적인 데이터를 출력하는 고난도의 문제와 씨름해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 상황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라면 매년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주최가 불분명한 경시대회가 과거 우후죽순 난립하면서 재능 계발과는 상관없이 대학 입시의 수단으로 악용된다는 비판도 많았다. 물리 수학 등의 올림피아드에서 상을 받고도 이공계를 기피해 다른 전공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학원에서 경시대회용 영재들이 기계처럼 양산된 탓이다.
김 교사는 “이제는 경시대회가 많이 ‘정리돼’ 우수한 학생을 발굴하고 능력을 계발하는 양질의 대회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대표적 대회인 올림피아드에는 수학과 과학, 정보뿐 아니라 지리, 철학 분야도 있다. 과학은 다시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으로 나뉜다. 정보올림피아드만 해도 지역대회와 전국대회를 거쳐 국가대표 상비군에 뽑히고, 세계대회에 참가하는 과정이 우수 학생들의 도전정신을 자극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김 교사는 “획일화된 하향 평준화로 영재의 재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는 게 우리 공교육의 현실”이라며 “궁극적으로는 공교육이 영재교육을 담당해야겠지만 지금은 영재들의 성취욕과 동기 부여를 위해 제대로 운영되는 경시대회 참가를 적극 장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출생: 1991년 10월 16일 부산 △가족: 아버지 어머니 오빠 △취미: 음악 듣기 △특기: 컴퓨터 프로그래밍, 노래 부르기 △출신교: 2004년 부산 내산초 졸업, 2007년 부산 온천중 졸업, 민족사관고 입학
△수상: 한국정보올림피아드 초등부 은상(2003년)·중등부 장려상(2004년)·중등부 동상(2005년), 전국 초중학생 IT꿈나무 올림피아드 초등부 우수상(2003년)·중등부 장려상(2004년)·중등부 장려상(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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