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미국 하버드대를 3년 만에 마치고 독일 괴팅겐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천재 이론물리학자였다. 신문도 보지 않는 세상 물정 모르는 학자였다. 1929년 대공황으로 주식시장이 대폭락했다는 소식을 1932년에야 처음 듣고 깜짝 놀랐을 정도다.
그를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만든 것은 애국심이나 공명심보다는 순수한 탐구욕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가 아니었다면 과학기술자 12만5000명이 동원된 사상 최대의 과학 프로젝트는 가동되지 못했을지 모른다.
8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인재들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특히 그는 과학자들에게 이 프로젝트는 어디까지나 대학원 세미나 같은 토론 방식으로 그들이 직접 운영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행정책임자 레슬리 그로브스 대령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펜타곤(미 국방부 건물) 건설을 지휘해 명성을 날린 공병장교 출신이었다. 그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여서 한번 화를 내면 목 혈관이 터질 것처럼 불뚝 튀어나오곤 했다.
그는 ‘이제까지 누구도 보지 못한 괴짜와 변덕꾸러기 집단’을 군대식으로 운영하려 했다. 과학자에게 계급을 부여하고 복장을 통일했으며 군사훈련까지 시키려 했다.
뉴멕시코 주 사막 한가운데 갇혀 지내는 것을 못 견뎌 하던 과학자들이 가만있을 리 없다. 오펜하이머는 “만일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운영하지 않으면 원자폭탄은 꿈도 꾸지 말라”며 그로브스에게 맞섰다.
이런 갈등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루스벨트는 1943년 6월 29일 오펜하이머에게 한 통의 서한을 보냈다. 큰 글씨로 비밀(secret)이라고 표시된 이 서한에서 루스벨트는 ‘박사께서 잘 아시는 비밀 계획’을 거론하며 오펜하이머를 과학자들의 지도자로 인정했다.
특히 루스벨트는 ‘그 문제(오펜하이머와 그로브스의 반목)’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며 과학자들을 진정시켜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과학은 적의 어떤 도전도 충분히 감당해 낼 것”이라고 과학자들을 격려했다.
이 서한은 오펜하이머의 승리를 뜻했다. 원자폭탄은 엘리트 과학자들의 자유분방한 연구 방식이 만들어 낸 성과였다. 비록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과학자 대부분은 12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죽음의 신’을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평생 시달려야 했지만….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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