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을 빕니다]‘조선 마지막 무동’ 김천흥 선생

  • 입력 2007년 8월 20일 03시 05분


‘조선시대 마지막 무동’으로 알려진 김천흥 옹이 생전에 춘앵무를 추는 모습. 동아일보 자료 사진
‘조선시대 마지막 무동’으로 알려진 김천흥 옹이 생전에 춘앵무를 추는 모습. 동아일보 자료 사진
원로 국악인 심소 김천흥(사진) 씨가 18일 오전 11시 50분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8세.

○궁중무의 대명사

고인은 조선시대 궁중음악과 무용을 배운 최후의 예인이자 한국무용사의 산증인으로 꼽혔으며 궁중 정재(呈才·궁중무)의 대명사로 불렸다.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어려서 신학문을 배웠지만 집안의 어려운 사정 때문에 13세 때 숙식을 제공하고 봉급도 주는 이왕직아악부에 들어갔다. 1년 동안 궁중음악과 무용을 배운 뒤 재능을 인정받아 이듬해 순종황제 50세 경축연에서 무동으로 뽑혀 첫 무대를 장식했다.

훗날 그는 “왕실 일가친척과 일본 고관대작이 둘러앉았는데 다리가 후들거렸으며 전신을 땀으로 목욕했다”고 회상했다.

스물넷의 나이로 아악수(雅樂手)의 으뜸 자리를 차지했지만 1940년 그만둔 뒤 민속무용의 대가 한성준에게 승무를 배우는 등 민속음악과 무용을 익혔다. 1955년 ‘김천흥 무용연구소’를 연 그는 수준 높은 창작무용을 발표해 주목받았고 57년 ‘한국가면극보존회’를 만들어 탈춤 연구와 전승에 힘쓰는 등 영역을 가리지 않는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궁중과 민속의 춤을 두루 익혔던 그는 해금 아쟁 양금을 능숙하게 연주했으며 적벽가 선유가 등 12잡가와 사설시조 휘모리시조 등도 익숙하게 불렀다. 별세 소식에 무용가 김매자 씨는 “문화재 하나가 사라졌다”며 안타까워 했다.

○서울대 이화여대서 숱한 제자 길러내

40여 차례나 전셋집을 옮기는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월사금이 없는 제자에게는 돈을 받지 않았던 그는 서울대 이화여대 한양대 등에서 숱한 제자를 길러냈다. 1993년 국립국악원 퇴직금 등을 모아 서울대 국악과에 5000만 원을 장학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90대에도 왕성한 활동을 과시한 그의 건강비결은 항상 화제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소식, 채식을 하며 젊어서는 조깅을, 나이 들어서는 등산을, 아주 나이 먹어서는 스스로 개발한 아침 체조를 빼놓지 않고 한다”며 건강비결을 공개했었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기도 했던 고인은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금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심소 김천흥 선생님의 우리춤 이야기’ ‘한국무용의 기본무보’ ‘정악양금보’ 등을 남겼다.

유족으로 아들 정운(재미·사업) 정완 씨, 딸 정순(재미) 정원(〃) 정실(〃) 씨 등 2남 3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 강남성모병원, 발인은 22일 오전 9시, 영결식은 오전 10시. 국립국악원 별맞이터에서 국악인장으로 치러진다. 02-590-2609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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