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클린 부비에 케네디 오나시스. 백악관의 안주인이자 그리스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의 부인, 미국 상류층 사교계의 대모, 뛰어난 출판사업가, 디자이너가 아니면서도 자신의 이름이 붙은 패션(재키룩)을 만들어낸 고혹적인 여인은 이렇게 자신의 공적인 삶을 시작했다.
대통령 부인으로 있었던 기간이 3년이 채 안 됐음에도, 전남편인 존 F 케네디보다 한참 못생기고 나이도 많은 데다 사생활마저 복잡했던 오나시스와 재혼까지 했음에도, 재클린은 많은 미국인에게 ‘영원한 퍼스트레이디’로 기억되고 있다.
딱딱한 정장 대신 몸에 딱 붙는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챙 넓은 모자를 쓴 젊은 영부인은 변화를 갈망했던 미국인들에게 신선하고 세련된 충격이었다. 더욱이 1961년 댈러스에서 남편을 총탄에 잃은 비극적인 삶은 그녀를 비운의 여주인공으로 각인시키는 극적인 장치였다.
하지만 재클린의 삶은 완벽한 각본과 고도로 정치화된 계산이 낳은 한 편의 드라마라는 평가도 많다.
신학교수 겸 전기 작가인 도널드 스포토가 쓴 ‘세기의 연인, 재키(Jacqueline Bouvier Kennedy Onassis: A Life)’에 따르면 젊은 시절 케네디는 능력 있고 매력적이었지만 거칠고 제멋대로였다. 그에게 철학 서적을 읽히고 인권 문제에 눈뜨게 한 이가 재클린이었다.
1957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케네디의 저서 ‘용기 있는 사람들(Profiles in Courage)’도 상당 부분 재클린이 썼으며, 미국 정치사의 명문(名文)이라는 케네디의 연설문에도 그녀가 깊이 관여했다.
또 본인이 공식 석상에 입고 나가는 옷을 ‘국가 의상’이라고 부를 정도로 젊은 퍼스트레이디로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남편이 죽자 그녀를 추앙하던 미국인들의 기대를 미련 없이 뿌리치고 오나시스와 재혼할 정도로 현실적이고 냉철했다.
강한 여자 재클린도 공인으로서의 삶이 버겁긴 마찬가지였나 보다. 자신처럼 남편의 바람기로 고민한 동서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거 캠페인 때 개처럼 일하기보다는 차라리 맞바람을 피워라”라는 충고 아닌 충고를 했으니 말이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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