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내가 살던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는 ‘진설당’이라는 빵집이 있었다. 엄마는 유난히 빵을 좋아하는 딸을 위해 그 집에서 식빵을 사다 주시곤 했다. 그 빵집에선 식빵을 자르지 않고 덩어리째 팔았는데 나는 그 덩어리 식빵을 ‘닭고기’라고 불렀다. 그 시절 우리 집은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다. 고기가 먹고 싶을 때면, 난 TV에서 아이들이 닭고기를 우적우적 뜯어먹는 장면을 흉내 내며 식빵 속살을 고기 살점인 양 떼어 먹곤 했다.
엄마는 남의 집에 빈손으로 갈 수 없을 때면 꼭 식빵 한 덩어리를 사 들고 가셨다. 아마 값도 싸고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을 거다. “엄마는 만날 식빵이야” 하면서 난 진열대 속의 케이크를 황홀한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흠집 하나 없이 하얀 크림이 매끄럽게 발린 케이크는 일년에 한 번, 생일에나 먹었다.
뮤지컬 배우가 된 뒤 나는 어릴 때 그토록 먹고 싶었던 케이크며 크림치즈가 들어간 크루아상 샌드위치와 온갖 종류의 빵을 원 없이 사 먹을 수 있게 됐다. 하루에 한 끼는 기본이고 두세 끼를 모두 빵으로 먹기도 할 만큼 20년 넘게 빵을 먹다 보니 웬만한 빵은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반죽은 얼마나 오래 했는지 먹기만 해도 대충 알 것 같다.
빵에 관한 한 ‘장금이’ 수준인 까다로운 내 입맛을 사로잡은 것은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한 아파트 상가 안에 있는 ‘김영모 과자점’이었다.
1982년에 문을 연 그 작은 빵집은 내가 그 동네로 이사 갔을 무렵엔 이미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선 맛있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뉴욕 제과’니 ‘독일 빵집’ ‘나폴레옹 제과’처럼 외국 냄새를 풍기던 다른 빵집과 달리 주인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내걸었다는 것이 특이했다. 나 역시 이름을 내걸고 공연을 하는 배우인 만큼 빵집 이름에서 주인의 자존심이 느껴져 마음에 들었다. 빵집에 있는 거의 모든 빵을 썰어 놓아 고객들이 마음껏 시식해 볼 수 있게 한 주인의 넉넉한 마음도 좋았고, 슬쩍 엿보이는 맛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도 믿음직했다.
중국집을 자장면 맛으로 평가하듯 빵집을 평가하는 나의 기준은 식빵이다. 식빵은 다 비슷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나는 수많은 식빵 중에서 맛만 보고 그분의 식빵을 골라낼 자신이 있다. 심지어 먹지 않고도 식빵을 찢어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그분이 만든 빵은 결이 오롯이 살아 있다. 나는 서초동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했지만 여전히 차를 몰고 식빵을 사러 그곳을 찾는다.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분의 빵을 통해 나는 뮤지컬 배우로서의 삶과 자세를 배웠다. 그분이 만드는 빵의 맛은 곧 내가 추구하는 연기의 맛이다.
빵이 너무 달면 처음엔 맛있을지 몰라도 입만 버리고 쉽게 질린다. 빵에 관한 한 입맛이 까다로운 내가 10년도 넘게 김영모 님의 빵을 찾는 단골이 된 것은 그 맛이 한결같고, 과하지 않되 심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맛이 질리지 않는 매력이다.
생각해 보면 뮤지컬 배우로 막 데뷔했던 초기, 난 달콤한 맛으로 입맛을 단번에 사로잡고 싶었던 것 같다. 제과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화려한 케이크처럼 나는 무대 위 조명 아래서 주목받길 원했다. 20대 때 ‘그리스’나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같은 작품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섹시하게 보이려고 춤을 추면서 허리도 남보다 더 뒤로 꺾곤 했으니까.
나이를 먹으면서 입맛도 변하나 보다. 케이크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요즘 내가 그분의 빵집에 가면 가장 자주 집어 드는 건 식빵 같은 기본적인 빵들이다.
식빵 자체도 맛있지만 식빵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얹기도 하고, 고구마를 으깨 얹어 먹기도 한다. 치즈, 야채와 조화를 이뤄 맛있는 샌드위치로 변신할 수도 있다.
누가 내게 어떤 배우가 되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이젠 자신 있게 ‘식빵 같은 배우’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후배와 동료들의 연기의 ‘맛’을 잘 살려 주고 감싸 줄 수 있는….
언젠가 김영모 님의 인터뷰 기사에서 크리스마스에 만든 케이크의 향이 좀 이상하다는 이유로 400개를 모두 버렸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품질을 관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얘기였다. 그런 성실한 관리가 작은 동네 빵집을 국내 정상의 브랜드로 키웠을 거다.
그가 걸어온 길은 곧 내가 걸어가고 싶은 길이기도 하다. 그는 17세 때 제과점 보조로 빵을 만들기 시작해 40년 가까이 한길을 걸으면서 결국 자기 분야의 최고 자리에 올랐다. 나 역시 비슷한 나이에 뮤지컬을 시작해 한눈팔지 않고 무대에 선 지 내년이면 20년이 된다.
기본에 충실할 것, 정직할 것. 한길을 걸을 것…. 빵의 철학을 통해 내게 말없이 배우의 길을 새삼 일깨워 준 그는 내 마음속에서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다.
최정원 뮤지컬 배우
■“최정원씨 연기 맛보고 싶군요”
“뮤지컬 배우 최정원 씨요? 아, 잘 알고말고요. 우리 가게에 자주 오십니다.”
‘김영모 과자점’ 대표인 김영모(53) 대한제과협회장은 최 씨 이야기가 나오자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매일 가게에 들른다는 김 씨는 단골손님인 최 씨를 기억하고 있었다. “신제품이 들어오면 맛에 대한 품평도 해 주시고 이것저것 묻고 가시는 분입니다.”
오전 6시부터 4개의 매장을 매일 둘러본다는 김 씨는 가게에 자주 오는 손님의 얼굴은 물론 사 가는 빵도 대부분 기억한다고 한다. 특히 김 씨는 뮤지컬에 관심이 많아 최 씨의 얼굴은 멀리서도 알아볼 정도다. 자서전 ‘빵 굽는 CEO’를 비롯해 여러 권의 책을 펴내기도 한 그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제과 제빵 안내서를 펴내 디저트북 분야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올 8월에는 노동부가 선정하는 ‘기능 한국인’에도 뽑혔다.
최 씨가 찾은 서울 서초구 서초동 매장은 김 씨가 제과점을 처음 시작한 본점이기도 하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드나들어도 여전히 39.6m²(12평)의 작은 공간을 고수하고 있다. 규모가 커지면 품질 관리에 소홀함이 생길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다. 그 때문에 김 씨는 여러 차례 제안이 들어왔지만 프랜차이즈 사업화를 거절하고 직영점 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빵 맛의 비결은 ‘정성’뿐”이라며 겸손해하는 김 씨는 프랑스로 제빵 유학을 간 둘째 아들이 돌아오는 대로 사업보다는 후진 양성에 나설 계획이다.
김 씨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한 달에 한 번 부인과 뮤지컬을 꼭 챙겨 보는 뮤지컬 마니아이기도 하다. 지난달에도 ‘댄싱 섀도우’를 봤다는 김 씨는 정작 최 씨의 작품은 접할 기회가 번번이 어긋나 아쉬웠다고. 그는 “최정원 씨가 ‘시카고’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는데 이번엔 꼭 챙겨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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