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도 학위논문으로 인정받아야”

  • 입력 2007년 11월 22일 03시 02분


《“학술진흥재단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번역도 교수들의 연구업적으로 인정받도록 만들었으니 이젠 학생들의 학위논문으로 번역이 채택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다음 달 4일 공식출범하는 한국고전번역원 초대 원장에 선임된 박석무(65·사진) 원장은 고전번역원의 숨은 산파다. 일반에겐 13, 14대 국회의원으로 더 유명하지만 그는 초선의원이던 1988년부터 우리 한문고전에 대한 체계적 번역사업을 위해 번역청을 신설하고 번역대학 및 번역고등학교를 세울 것을 역설해 왔다.》

1965년 수립 이후 불규칙한 정부보조금에 의존해 번역사업을 펼쳐 온 민족문화추진회(민추)가 교육인적자원부 산하 공식 정부출연기관인 고전번역원으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20년 전 그가 뿌린 씨앗의 결실이란 게 학계의 중론이다. 그 덕분에 고전번역원은 지금의 2배가 넘는 85억 원의 예산규모에 인력도 80여 명으로 40%가량 늘어나게 됐다.

“1차 목표는 고전번역원을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진흥재단과 함께 교육부 산하 3대 학술기관으로 정립하는 것입니다. 민추에서 저를 응원한 것도 그런 강한 추진력을 기대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박 원장이 민추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79년 고등학교 교사로 일할 때 다산 정약용의 서한집을 번역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였다. 그는 1984∼1988년 국역위원으로 ‘허균 전집’ ‘다산서한집’ 등의 번역에 참여했고 1998년부터 민추 이사로 기획편집위원장을 맡아 ‘연암집’ ‘속 한국문집총간’의 번역사업을 이끌었다. 올해 고전번역원 법안이 통과하는 과정에선 설립추진위원장으로 활약했다.

법학을 전공한 그의 한문 실력은 가학(家學)의 산물. 6·25전쟁 때 초등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해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고등학생 때 사서(四書)를 뗐다. 그가 고전번역에 뛰어든 것은 ‘타의에 의해 얻은 겨를’ 때문이었다. 1973년 전남대 ‘함성’지 사건에 연루돼 치른 근 1년의 옥살이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탄생시켰고 1980년 5·18민주화운동으로 인한 8개월의 수배생활과 1년 3개월의 옥살이가 ‘다산 산문선’으로 이어졌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다산 글을 번역하며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논문 한 편 쓰는 것보다 제대로 된 번역서 한 권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뼛속까지 체험했지요.”

비록 ‘운동’이 그를 유명 정치인으로 만들었지만 결국 그가 택한 것은 ‘학문’이었다. 정계은퇴 이후 학술진흥재단 이사장, 다산연구소 이사장(현), 단국대 이사장, 성균관대 석좌교수(현)로 학계를 지켜 온 그는 “계속 정치를 했으면 지금의 내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사등기가 끝나지 않아 서울 강남구 논현동 다산연구소 이사장사무실에서 집무 중인 그는 요즘 옛 동료 의원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고전번역원의 예산 삭감을 막으려 고군분투하고 있다.

“의원 비서관들이 고전번역원장이라고 하면 바꿔 주지 않아도 박석무 전 의원이라고 하면 바꿔 줍니다. 제 임기 동안 그걸 바꿔 놔야죠.”

그래서 그가 강조하는 것이 ‘소통성’이다. 그것은 대중과의 소통, 학술기관과의 소통이다. 퇴계집, 율곡집, 연암집 등에서 대중이 쉽게 접할 만한 글을 골라 ‘선집’을 펴내고 일반인의 조상이 남긴 편지와 비문 등 한문기록에 대한 번역 서비스를 해 주는 것이 전자라면, 다른 학술기관이 참여하는 ‘고전번역위원회’를 통해 고전번역사업을 조율하는 것이 후자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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