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나는 어머니를 따라 한 해에 두 번 절에 갔다. 한 번은 동짓날이었고 또 한 번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동짓날은 절에서 먹는 붉은 팥죽이 좋았고, 부처님 오신 날에는 절 마당에 내걸린 연등이 고왔다. 어머니는 두어 되의 쌀과 양초를 보자기에 싸서 나를 앞세워 김천 직지사 말사인 용화사엘 갔다. 용화사에는 큰 석불이 있었다. 어머니는 큰 석불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기도를 올렸다. 나는 어머니의 입이 꼭 물고기의 입 같아 웃겨 죽겠다며 법당 안을 마구 돌아다니던 예닐곱 살의 아이였다.
어머니는 절에 가시기 전 며칠 동안은 음식을 가려서 드시고 절에 가는 날 새벽에는 목욕물로 세속의 몸을 씻었다. 지금 돌아보면 어머니가 큰 석불 앞에서 중얼중얼하던 그 몽돌 같은 말씀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진실한 기도라는 것을 알겠다. 아무튼 나에게 불교와의 인연은 큰 석불이 있는 시골 절로부터 시작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불교방송 입사시험을 보게 되었다. 당시에 불교와 관련한 논술시험이 있었는데 나는 마땅히 쓸 것이 없어서 ‘육조단경’에 나오는 게송을 적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게송의 뜻은 대강 이러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환한 거울 역시 경대(鏡臺)가 없는 것/부처의 성품은 항상 청정하거니/어느 곳 먼지와 티끌 앉을 자리 있으랴.’ 너무나 간략해서 당돌하기 그지없었을 이 답변 덕택에 나는 요행히 입사를 허락받았다. 입사 후에는 경전도 읽고 여러 스님의 말씀을 청해 들었다. 나는 만나는 스님들에게 궁금한 것을 질문하고 그 답변을 듣는 것으로 나의 의혹을 풀어나갔다. 경전 속 부처의 모든 말씀이 대중과 묻고 답하는 즉문즉설(卽問卽說)이었듯이.
많은 스님과의 만남 가운데서도 도법 스님과의 만남은 나에게 좀 특별했다. 스님의 말씀은 너무나 명료했고 구체적이었으며, 해서 나의 미망(迷妄)을 걷어내 주었다. 도법 스님을 뵙게 된 것은 순전히 일 때문이었다. 2001년 12월 스님과의 방송 대담을 위해 실상사로 찾아가는 내내 폭설이 내렸다. 약속한 시간보다 두어 시간 늦게 도착한 실상사는 평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실상사 맞은편 들과 산으로 눈보라가 휘몰아쳐 가는 것을 나는 한참 바라보았다. 스님은 궂은 날씨에 먼 길을 왔다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첫 만남에서 스님은 ‘대화’와 ‘설득’에 대해 말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서로의 견해가 충돌해서 우거진 덤불 같이 되어도 대화를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다시 도법 스님을 찾아뵌 것은 실버들이 올라오는 2002년 초봄이었다. 스님은 삽을 들고 밭을 일구고 있었다. 스님은 매화차를 내주었다. 스님은 ‘생명’에 대해 말했다. 씨앗으로부터 싹이 돋는 데에는 햇빛의 도움, 거름의 도움, 흙의 도움, 물의 도움, 바람의 도움, 농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우주생명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해 말했다. 출가 수행자들이 예로부터 걸사(乞士)로 불린 까닭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도 했다. 몸과 마음의 소욕에 대해 말했다. 고운 볕이 국숫발처럼 널리는 초봄 오후였다.
스님은 2004년부터 지금까지 전국을 돌며 생명평화탁발순례를 하고 있다. 걸사처럼 얻어먹고 얻어 자면서 전국을 순례하고 있다. 땡볕과 뇌우 속에서도 순례는 계속되었다. 스님은 순례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사물과 사람을 스승으로 삼고, 언제나 경청과 배움의 자세를 갖자’는 순례자 수칙을 정해 주었다. 순례 행렬이 도법 스님의 고향인 제주도의 마을을 지날 때, 고향 어르신들이 큰스님이 되어 돌아온 도법 스님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을 내걸고 떡을 하고 전을 부치는 등 음식을 직접 장만해 순례자들을 대접했다고 한다. 그 자리서 고향 어르신들은 어릴 적 개구쟁이였던 도법 스님 얘길 꺼냈고 스님은 “잘 모르겠네요. 기억이 안 나요”라고 웃으며 답해 좌중이 한바탕 웃었다고 들었다.
탁발 순례를 하고 있는 스님을 두어 번 다시 만났다. 낡은 가사를 입은 스님은 깡말라 있었다. 스님은 생명의 밥상에 대해 말했고, 눈빛이 성성했다. 요즘의 우리가 예전보다 더 편해지고 더 부자가 되고 더 좋은 음식을 먹지만 왜 우리의 마음은 더 불안하고 더 큰 공포가 살게 되었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스님은 몽둥이를 버리고 무기를 내려놓고 생명을 해치거나 괴롭히지 않고 해치는 원인을 만들지 않을 때 생명평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스님은 불교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마다 대화로 대타협을 이끌어 냈다. 그리고 당신 몫의 일이 끝나면 홀연히 수행자로 되돌아갔다. 나는 스님의 툴툴 털고 돌아서는 그 걸사의 정신이 좋다.
나는 아직 탁발 순례 행렬에 참여하질 못했다. 박남준 시인이나 이원규 시인에게서 탁발순례 소식과 도법 스님의 근황을 전해 듣고 있는데, 나도 내년에는 탁발순례 행렬의 말단에 서서 이 땅을 걸어가고 싶다. 스님은 순례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그대가 있어 내가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씀을 얻어 안는다. 도법 스님을 생각하면 다시 나에게 오늘의 불교는 새롭다.
생명평화 탁발순례 4년…“당신이 있어 내가 있습니다” 따뜻한 한마디… 툴툴 털고 돌아서는 ‘걸사의 정신’ 보기 좋네요
■“문시인 내년 순례때봅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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