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일장춘몽(一場春夢)이더라. 내 생각 내 느낌들 또한 다 백일몽이더라.
감히 여기에 하나 더 한다.
어릴 때 학교 정문 앞 구멍가게 문방구에 들어가 얄팍한 공책 한 권을 샀을 때의 그 가슴 설레는 행복이 아직도 선하다.
며칠째 그 공책에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 그 공책의 빈 한 장 한 장이, 푸른 줄만 그어진 그 한 장 한 장이 내가 쓸 문자를 위해 자신의 공간을 바쳐 맨몸 그대로 기다리고 있지만, 나는 거기에 내 어설픈 것을 써서 그 백지의 절대를 무너뜨릴 수 없었던가. 심지어 그 공책 표지에 이름도 쓰지 못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다.
그 백지의 관능과 외경(畏敬)이 아직껏 이어지고 있을 줄이야.
사상이 칼이 아니기를, 울음이기를.
사상이 증오가 아니기를, 피범벅이 아니기를, 해질녘 서러운 짐승의 뒷모습이기를. 함초롬히 아침 메꽃들이기를.
해가 떠오른다. 바다 수평선의 파도 전체는 당연히 염분으로 되었을 것이다. 그 파도의 어느 부위에 놀랍게도 담수가 고여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외로운 담수 언저리의 청정(淸淨)으로부터 이제 막 솟아올라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는 햇덩이가 벌써 수평선 위로 두둥실 떠 빛난다. 이로부터 눈부시다. 오래 바라보면 영락없이 눈이 멀 것이다. 찬란함이란 끝내 암흑일 것이다.
이렇게 하루 또는 한 해가 시작한다.
쉬이 생각건대, 일출의 장엄과 일몰의 장엄 사이에 하루가 있다. 나는 이 하루살이를 거듭하는 한갓 우주 속의 미생물 아닌가. 아메바 혹은 귀신의 쓰레기나 티끌 아닌가.
인간이란 저 혼자 내로라하고 오만할수록 그 얼마나 미미한 것인가. 인간의 실체란 과연 어디까지이겠는가.
하나 이 하잘것없는 하루하루의 이름 없는 일상을 업신여길 수 없다. 이 하루의 존엄이야말로 천년의 씨앗이고 만년의 열매 아니런가.
해가 떴으니 나도 들메끈을 매고 이슬 차며 길을 나서야겠다. 길은 어디에나 이미 있다. 루쉰(魯迅)은 괜히 여럿이 가면 그것이 길이 된다는 허튼소리를 했던가.
세상은 자꾸 채워지고 있다. 벌써 꽉 채워진 데도 많다. 이 만원과 초만원 속에서 어찌 공허함이 없겠느냐.
어느 날 나는 내 마음의 동굴 속에 오래 갇혀 있고 싶었다. 천칠백공안(千七百公案)의 한 놈을 부여잡는 노릇 따위가 아니다. 그냥 호젓이 허허실실로 멍텅구리이고 기계충 앓는 멍청이고 바보이고 싶은 것이다. 바보의 형이상학이 장차의 형이상학 아닐까.
아기들아 사랑 가지고 장난치지 말거라. 사랑은 반드시 죽음에 닿아 있단다. 운명에 거는 것! 사랑!
지금의 나로부터 6만 년 전쯤의 나로 돌아가 방금 두 발로 일어서서 아침 해를 바라본다. 달력이 없는 그 시절이 얼마나 거룩한가.
절로 고개 숙인다.
이 무식한 원시의 경배(敬拜) 일념(一念)이 어떤 영웅의 모험이나 용기보다 약자의 신앙을 낳았는지 모른다. 모든 종교 행위의 첫걸음은 이토록 순결했다. 그 뒤로 그것은 환장하고도 남게 제도의 왕국이 되고 만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들은 그다지 고상하지 않다. 좀 다른 눈으로 보라. 고딕사원 얼마나 유치한가.
역사라는 말 한마디 없었다면 어쩔 뻔했던가.
개도 걸도 뫼도 역사!를 입에 달고 살았다. 나 또한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어서 그 생경한 역사의식을 불러 자신을 다그쳤다.
그러는 동안 역사의 어쩔 수 없는 절실성을 만나지 않은 바 아니었다. 역사 속에서만 나는 자아가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을 역사적 인간으로 정의할 때 나는 참다웠다. 아직도 내 긍지의 한 부분으로 살아 있는 당위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나에게 다른 관념 하나가 스며들었다. 벌써 10년 안팎이 된다.
역사란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한술 더 뜨면, 역사의 자연화를 강조하고자 한다. 이런 내 인식 변화는 역사를 더는 인간의 고유한 가치로 강조하지 말자는 것, 역사를 자연의 원 위치에 반납하자는 것에 맞닿는다. 아니, 역사가 자연의 모방임을 확인하기에 이른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사적 유물론(史的 唯物論)이 아니다. 자연과 우주의 운행으로서의 그것이겠다.
자연은 인간의 상대 가치가 아니다. 자연이 인간의 범주 안의 이분법에 해당한다는 논리야말로 근대의 미혹(迷惑)이다.
자연은 또한 인간의 이용 가치로만 그 존재 이유가 성립되지 않는다. 문화 혹은 문명의 인간학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불충(不忠) 불효(不孝)의 야만인지 모른다.
공룡 다음이 인간이라면 인간 다음은 어떤 버러지일 것인가.
이 지구 생태의 유장한 생멸(生滅)과 흥망성쇠의 미래 앞에서, 아니 몇백 광년 전에 죽어버린 무지막지한 과거의 별빛으로 나의 현재를 삼고 있는 인간의 허방 같은 내일 앞에서 인간의 역사란 애당초 이 세계의 한 소꿉놀이임에 틀림없다. 나는 조물주라는 것도 허울이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지구라는 행성(行星) 하나가 무궁토록 실재할 것이라는 희망도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새삼 알아야 하겠다.
저 50년대 폐허에서의 내 허무주의는 살아남은 자의 상흔만이 아니었던가.
여기서 못 박아 둘 것이 있다. 자연이란 이제까지 인간이 설왕설래해 온 그런 자연이 아니라는 것, 굳이 말하자면 무위자연 그 근처라는 것.
헤겔의 세계정신 또는 누구의 역사정신 그런 것은 말하기 좋아하는 입에서 나와 버린 유령의 어휘 아닌가.
고은 시인·서울대 초빙교수
고은 시인은
고은 시인은 1933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다. 10대를 6·25전쟁으로 인한 절망감과 죽음의 충동 속에서 살다가 19세 때 해인사에서 출가했다(법명은 일초). 1958년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천거로 ‘현대시’에 ‘폐결핵’을 발표했고 미당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봄밤의 말씀’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했으며,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을 펴냈다. 1962년 환속 선언을 했다.
초기 작품은 탐미적이고 허무주의적이었지만 1970년대 이후 엄혹한 시대와 더불어 그의 시엔 강렬한 사회의식과 저항정신이 깃든다. 이즈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등에 참가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서사시 ‘백두산’ ‘만인보’를 썼다. 1990년대 이후 동양적이고 불교적인 시 세계로 옮겨가 선시(禪詩) 작업에 힘을 기울였다. 이 선시가 해외 시단의 호응을 받으면서 각국에서 열리는 시인대회와 문학 강연, 시 낭송회에 활발하게 참가해 세계로 발을 넓혔다. 2002년 이후 해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거론돼 왔다.
시집 ‘문의마을에 가서’ ‘새벽길’ ‘조국의 별’ ‘두고 온 시’ 등이 있으며 2003년 ‘고은전집’(전 38권)이 나왔다. 한국문학작가상, 만해문학상, 중앙문화대상, 대산문학상, 스웨덴 시카다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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