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중퇴 후 독일에서 광원으로 활동했던 영화인이 48년 만에 학사모를 쓴다. 25일 고려대 학위수여식에서 경제학과 졸업장을 받는 김태우(67) 신영필름 대표가 그 주인공. 그는 22일 통화에서 “42년 만에 교정을 밟으며 가슴 벅찼던 게 불과 2년 전인데…”라며 “학업을 끝맺지 못한 한을 이제야 풀게 됐다”고 기뻐했다.
1960년 경제학과에 입학한 김 대표가 독일로 건너간 것은 1964년. 3학년 2학기에 재학 중이던 김 대표는 학교 시험을 포기하고 독일 광원 시험에 응했다.
“그 당시에는 저뿐만 아니라 대학생, 경찰, 의사들이 지원을 했어요. 경제적으로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 될 때였고 정치적으로는 4·19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시기였죠. 더 넓고 더 나은 세상에서 배워보고 싶다는 열망이 컸어요.”
독일로 간 김 대표는 3년간 광산에서 하루 8시간의 중노동을 견뎌냈다. “지하 1000m 탄광에서 섭씨 38도의 열을 견디는 일은 지옥이었다”고 말할 정도다. 그는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잦은 기침에 시달린다.
광원으로 계약이 끝난 뒤 김 대표는 독일 뮌헨에 남아 세계적인 카메라렌즈 제작사인 아리플렉스에서 영화 촬영 기술을 배운다. “독일이 산업 국가이면서 시청각 교육에 상당히 앞섰어요. 저도 광산에서 안전교육을 비디오로 받았죠. 광산에서 독일 사회를 배울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도 바로 영상물이었고요.”
김 대표는 1968년 귀국해 이듬해 촬영장비 대여 업체인 신영필름을 설립했다. 3년 동안 모은 돈 180여만 원으로 장만한 카메라 장비가 밑천이었다. 김 대표는 주로 정부 홍보 영화를 제작했으며 ‘쉬리’ ‘왕의 남자’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 최근 흥행작에도 참여했다.
그러던 김 대표가 다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고려대 정경대학장을 지낸 이만우 교수 덕분이다. 후배인 이 교수는 “선배가 졸업하도록 돕겠다”며 김 대표를 부추겼다. 김 대표는 “손자뻘 되는 후배들과 공부하며 내가 오히려 더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영화인으로 입지를 굳힌 김 대표는 졸업과 동시에 해야 할 일이 쌓였다며 25세 청년이 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당장 3년 안으로 ‘1038’(1000m 막장에서 38도의 온도를 견뎠다는 뜻)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완성해야 하고, 외국인 노동자 복지사업도 시작할 겁니다. 거기에다 2010년에는 경기 파주시에 영화연구소도 건립할 예정입니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