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한두 문장이었던 글은 어느새 가로 23cm, 세로 11cm의 월급봉투가 비좁게 빽빽이 들어찼다. 그런 그가 2007년 3월 25일 35주년 결혼기념일에는 편지를 쓰지 못했다.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날이다. 1년 뒤 아내는 남편의 편지글을 모은 책 ‘월급봉투 러브레터’를 펴냈다.
○ 故 김유환 국민銀 부행장 미망인
이 책은 500부만 찍어 지인들에게만 돌렸다. 주인공은 국민은행 수석부행장과 KB데이타시스템 사장, 한국자금중개 사장을 지내다 생을 마감한 고(故) 김유환 씨. 부인 김용희(63) 씨는 40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다 2월 퇴직했다.
편지는 지극히 내밀한 개인사를 담고 있다.
아내에 대한 사랑, 두 자녀에 대한 기대와 염려, 직장생활의 고달픔, 생에 대한 절박함 등이 주된 내용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 시대의 ‘아버지 보고서’이기도 하다. 지난달 28일 김용희 씨를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있는 자택에서 만났다.
“처음 편지를 받기 시작한 게 1988년이었나 봐요. 초등학교 교사라 은행 마감 전에 나서려면 윗분들 눈치가 보였어요. 마침 남편이 은행원이다 보니 생활비를 찾아주기 시작했죠.”
‘월급봉투 러브레터’는 4년 가까이 그저 무심히 버려졌다. 그러다 1992년부터 모으기 시작한 편지는 170통가량 쌓였다.
‘언제나 밝고 건강한 우리 가정을 가꾸시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적은 금액이지만 사랑하는 마음 함께 담아 드립니다.’(1995년 1월 21일)
때로 편지글은 당시 한국 사회의 시대상을 담기도 했다.
‘IMF 한파가 모두의 앞날을 두렵게 하고 있군요. 사회를 뒤덮고 있는 불안감은 사람들의 관계를 어렵게 할 것입니다.’(1997년 11월 22일)
‘강원도 쪽에 비 피해가 엄청나대요. 언제나 힘든 사람들만 더 힘들게 되는 것 같아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2006년 7월 21일)
“지금도 25일만 되면 편지가 기다려져요. ‘이번에는 어떤 글이 올까’ 기대하면 한달이 행복했어요.”
김 사장과 함께 일했던 한 국민은행 간부는 그를 “상사로서는 일의 결과에 대해 용서가 없고 굉장히 철두철미했던 분이었다”고 말했다. 직장에서 그를 따랐던 부하들도 그의 편지글을 보며 이토록 정이 많고 여린 사람이었는지 깜짝 놀랐다고 했다. “가정 일은 제게 다 맡기던 사람이었어요. 경북 예천지점장일 때도 서울에서 집 계약을 해야 한다니까 한 번 보지도 않고 ‘당신 마음에 들면 계약해’라며 돈을 부쳐줬어요. 쇼핑을 해도 ‘왜 이런 물건을 샀느냐’고 따지지 않았어요.”
김 사장은 국민은행 리스크관리 부장이던 1999년 홍콩의 리스크 관리와 파생상품 분야 전문 잡지인 ‘아시아리스크’의 표지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 국민은행 수석부행장으로 2001년 주택은행과 합병을 진두지휘하느라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유명인’의 체면도 가족 앞에서는 바로 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두 딸이 순탄치 않은 혼인 문제로 고민할 때도 ‘네가 사는 인생이다. 엄마 아빠 체면 보지 말라’며 딸들의 선택을 지지했다고 한다.
이처럼 평화롭던 가정에도 두 번의 위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2002년 3월 고 김 사장이 국민은행에서 퇴직했던 일이다.
‘오랜 세월 동안 이렇게 당신에게 월급봉투를 주면서, 이렇게 편지를 쓰면서 많이 행복했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가 이렇게 갑작스레 나와 당신의 현실로 다가왔군요.’(2002년 4월 1일)
‘사오정’이라는 말이 한창인 시대에 58세까지 일했다면 축복받은 인생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예기치 못한 퇴직이 당사자에게 충격을 덜 주는 건 아니다.
“속으로야 다른 생각이 없었겠습니까만 ‘후배들한테 물려줘야지’ 한마디 하고는 유럽으로, 일본으로 한 달간 여행을 다녀오더니 기운을 내더군요.”
무직 기간에도 그는 25일이면 돈을 찾아 ‘러브레터’를 썼다.
‘벌써 3번째 무직자 월급봉투. 지난 3개월 동안 변화된 생활에 적응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지만 당신이 조금은 더 많은 부담을 느끼는 듯하여 미안하군요.’(2004년 6월 21일)
두 번째 위기에 비하면 첫 번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신혼을 50만 원짜리 전세방으로 시작한 평범한 은행원이 격동의 세월을 지나 이제 살 만하다고 느꼈을 때 위기가 찾아왔다. 폐암이었다.
‘이달은 당신과 우리 가족에게 시련이 다가온 한 달이 된 것 같습니다. 나의 입원 문제, 청천벽력 같은 나의 병 얻음!’(2006년 11월 21일)
2003년 건강검진에서 ‘폐 섬유화증’ 진단을 받은 뒤 꼬박 꼬박 컴퓨터단층촬영(CT)을 해왔기에 폐암은 너무도 놀라운 소식이었다.
“2001년 합병을 추진하면서 너무 큰 스트레스를 받은 게 아닌가 싶어요. 합병하면서 많은 직원이 구조조정되다 보니 노조에서는 반대했고 얼굴이 새카매진 채 경호원 앞세워 출근하곤 했습니다.”
○ 암사망 남편 이름으로 장학회 만들어
당시 은행 대형화 바람이 불면서 정부에서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을 추진했다. 국민은행 규모가 훨씬 컸지만 통합은행장은 김정태 전 주택은행장이 선임됐다. 국민은행 직원들은 거세게 반발했고 그 화살은 통합추진위원장이었던 김 사장에게로 향했다고 한다.
건강한 사람일수록 병의 진행은 빠르다고 했다. 김 사장은 병을 발견한 지 5개월 만에 숨졌다. 그 사이에도 그는 월급봉투에 꼬박꼬박 편지를 썼다.
‘지난 일주일 동안은 내가 항암제 치료 중에 치통까지 겹쳐 많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당신이 나를 위해서 금식 기도까지 하느라고 참 고생이 심했지요. 감사하고 미안했어요.’(2007년 1월 22일)
‘이달은 좀 정신없이 지나가고 있군요. 마음도 몸도 아팠다가 피었다가 하고…. 당신을 많이 울렸군요.’(2007년 2월 21일)
이 편지가 끝이었다. 김 씨는 남편 뜻에 따라 평소 다니던 교회인 서울 은평구 역촌동 역촌교회에 신학생을 지원하는 ‘유환 장학회’를 만들어 1억 원을 냈다. 남편의 이름을 딴 장학사업이다.
“장학회를 만들고 책도 내고 나니 이제야 남편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갚은 느낌이 듭니다.”
그는 아이들이 좋아 40년 교직생활 동안 초등학교 1학년 담임만 28번을 맡았다. 남편이 고위직 은행원이 돼도, 다른 교사들이 교감 교장이 돼도 오로지 현장을 지켰던 김 씨는 이렇게 슬픔을 이겨내고 있었다.
하임숙 기자 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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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촬영 : 박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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