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미국에 경마가 도입된 이후 1800년대에는 최고의 관람스포츠로 자리 잡았으나 1900년대 초 경마와 관련된 스캔들이 잇따라 터지면서, 정부는 돈내기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이 때문에 전국적으로 300여 개가 성행했던 경마장은 1908년에는 고작 25개에 불과했다. 미국의 ‘경마 암흑기’로 반사이익을 얻은 것은 멕시코의 경마 산업이었다. 국경 인접도시 티후아나는 ‘베팅의 메카’로 부상했다.
가난한 주 정부들은 대공황으로 빈 곳간을 채울 꿀단지를 찾아야 했다. 경마 돈내기를 인정하는 대신 높은 세금을 물도록 했다. 경마장 수가 70% 이상 늘어났다. 캘리포니아 주가 경마를 합법화한 뒤, 로스앤젤레스 인근 샌타애니타 공원에 있는 경마장 한 곳에서 관객들이 건 돈만 300만 달러에 달했다.
1933년 5월 23일 21전 20승을 이룬 명마 ‘맨 오 워(Man o' War)’의 손자 말 ‘시비스킷(Seabiscuit)’이 태어났다. 좋은 시기에 좋은 혈통을 타고 태어났으나 시비스킷은 제대로 된 조련을 받기는커녕 ‘먹고 자는’ 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작은 몸집에 구부정한 다리, 길들여지지 않은 성품 때문이었다.
보잘것없는 작은 대회에 출전하며 농담거리로 전락한 세 살짜리 시비스킷은 기수 레드 폴러드와 조교사 톰 스미스를 만나면서 과거의 굴레를 벗어난다. 큰 상금이 걸린 경마대회를 하나씩 제패해 가는 못난이 경주마는, 빈한한 삶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꿈꾸는 자화상이었다. 대중은 시비스킷이 그려내는 극적인 드라마에 열광했다.
시비스킷의 명성을 미 대륙 구석구석까지 퍼뜨린 일등공신은 라디오였다. 당시 미국 가정의 90% 정도가 라디오를 갖고 있었는데 시비스킷의 경주 날이면 어느 거리에서나 중계방송이 응원소리와 함께 흘러나왔다. 1938년 서부의 최강 명마 시비스킷과 동부 최고 명마 ‘워 애드미럴(War Admiral)’이 맞붙는 ‘세기의 대결’이 펼쳐졌다. 그해 최고의 뉴스메이커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도, 아돌프 히틀러도 아니었다. 작은 경주마 시비스킷이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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