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소통]아저씨, 시장통에서 예술판을 벌이다

  • 입력 2008년 7월 8일 03시 01분


6년 전 경기 안양시 석수시장에서 대안예술공간 스톤앤워터를 개관한 박찬응 대표는 사람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도록 ‘독립문화공간’을 표방한 카페도 열었다. 그는 “조그만 공간이 문화예술의 바이러스 배양소 역할을 한다”는 생각으로 재래시장에 예술의 씨앗을 퍼뜨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전시장이다. 안양=고미석 기자
6년 전 경기 안양시 석수시장에서 대안예술공간 스톤앤워터를 개관한 박찬응 대표는 사람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도록 ‘독립문화공간’을 표방한 카페도 열었다. 그는 “조그만 공간이 문화예술의 바이러스 배양소 역할을 한다”는 생각으로 재래시장에 예술의 씨앗을 퍼뜨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전시장이다. 안양=고미석 기자
스톤앤워터 개관 6주년 기념 아트마켓 ‘여섯번째 여름’은 오용길 김용익 권재홍 이부록 등 30대부터 60대 작가들이 참여해 18일까지 열린다.
스톤앤워터 개관 6주년 기념 아트마켓 ‘여섯번째 여름’은 오용길 김용익 권재홍 이부록 등 30대부터 60대 작가들이 참여해 18일까지 열린다.
안양 석수시장 대안예술공간 ‘스톤앤워터’ 박찬응 대표

그냥 지나칠 뻔했다. 전봇대에 걸린 플래카드가 없었다면. 경기 안양시 만안구에 위치한 석수시장에서 미술시장이 열린다는 소식에 대안예술공간 스톤앤워터(031-472-2886)로 가는 길이었다.

전통적 재래시장 주변은 한적했다. ‘여섯 번째 여름-스톤앤워터 개관 6주년 기념 아트마켓’이란 현수막이 홀로 손님을 맞이하고 그 골목 2층 건물에 교실 크기만 한 전시장이 있다. 6년간 이곳의 전시와 프로젝트에 참여한 66명의 사진 설치 회화 미디어 작품이 벽마다 다닥다닥 붙어 있다.

6번째 생일을 맞아 아트마켓을 선보인 박찬응(48) 대표는 재래시장에 예술의 씨앗을 퍼뜨리는 일을 하고 있다. 열 살 이후 안양천과 석수시장 언저리에서 보낸 38년. 그는 지역을 중심으로 한 문화모델을 만들어 보겠다는 꿈을 안고 ‘석수(石水)’에서 이름을 따온 공간을 마련했다. 시장의 빈 점포를 문화공간으로 활용한 ‘리빙퍼니처’ 개관전을 비롯해 실험적 작품을 소개해 왔다. 안양천을 따라 생태적 관점의 작품을 선보인 안양천 프로젝트, 간판 줄이기와 예술교육 등 ‘석수시장 프로젝트’라는 주제로 이루어진 활동은 모두 예술과 일상이 어떻게 결합하고 교류할 수 있는지를 모색한 작업이다.

“마을 만들기에 관심이 더 컸다. 시장을 미술관으로, 미술관을 시장으로, 이런 슬로건을 걸고 내가 사는 마을부터 내가 바꿔 보자고 덤빈 것이다. ‘간판 줄이기’부터 시작했는데 처음엔 의욕이 넘쳤다. 무식하게도 금방 뭐가 이뤄질 줄 알았다. 근데 간판 하나 바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석수시장을 예술시장으로 만들겠다는 꿈은 크지만 성과는 아직 미미하다.”

세종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그림을 그렸고 먹고살기 위해 다른 일도 벌였다. 외환위기 때 된통 시련을 겪고 손을 턴 뒤 석수시장에 작업실을 얻었다. 심기일전을 위해 독일로 여행을 떠났다. 길을 헤매다 우연히 찾아든 곳마다 오래된 마을과 마주쳤다. 긴 세월이 만들어낸 풍경을 보며 가슴속 램프에 불이 켜졌다. 예술로서 뭔가 이루고 싶다는 충동과 무엇을 이룰지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경계에서 그는 선택을 했다.

“지난해부터 시장의 빈 가게를 작업실로 제공하는 국제교류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외국작가들은 한여름 작업이 힘들 정도로 무더운 점포 작업실에 홀딱 반했다. 매일 마주치는 옷가게, 생선가게 주인과 인사를 나눴고 시장 사람들도 예술가를 어렵게 보지 않는다. 예술과 사람이 서로 소통하고 친해졌다.”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예술프로젝트다. ‘예술이 생활이고, 생활이 예술’이란 목표에 접근하고, ‘시장 속 문화공간’으로 알려지면서 구경들도 오지만 큰 변화는 없다. 그래도 ‘잘 버틴 것’이란 마음가짐으로 지역과의 유대를 위해 뉴스레터 ‘삽’을 창간하고, 주민 대상 예술강좌를 만들어 1기 수강생을 모집 중이며, 동네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카페 리자드’를 열었다.

“어쨌거나 문화는 돈이나 이벤트로 금세 갈아 치울 수 있는 게 아님을 확인했다. 퇴적된 층, 깊이만큼 향기가 풍기는 거다. 적어도 100년을 생각하면서 일해야 한다.”

원래는 뿌리내리는 작업을 하려 했으나 얼마 전 뉴타운 계획이 발표되면서 유목적 사고로 바꾸었다. “인생 자체가 잠시 지구를 빌려 쓰는 것 아니겠느냐. 뉴타운 덕분에 도망갈 구실이 생긴 거다. 시장이 흔적 없이 사라질 때까지 문화 인프라를 구축하는 실험을 하겠다.”

이런 실험은 카페 옆 ‘쌍둥이네 분식’의 벽화, 길모퉁이 미용실의 아담한 간판과 미적 감각을 살린 우편함, 두 집의 틈새공간을 청머루와 그림이 어우러진 한 평 공원으로 꾸미는 일로 이어졌다. 이래저래 헛방을 치기도, 제대로 들어맞기도 했지만 그에겐 다 살아 있는 예술작업이다. “남들이 보면 참 어려운 일 한다고 하지만 그건 아니다. 좋아서 하는 일이다.”

어린 시절 미로 같던 골목길은 반듯하게 펴지고, 대형마트에서의 쇼핑은 색동저고리처럼 각기 다른 고유의 색깔을 가진 길 위의 시장을 하나씩 지워간다. 기억이 각인된 장소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퇴화하고, 전 지구의 마을은 덧칠한 듯 균질하게 변해간다. 빠른 물살 속에서도 제 모습 그대로 덤덤하게 나이 먹어가는 동네가 그리운 사람은 그만이 아닐 것이다.

안양=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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